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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국외)

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by choco 2015. 10. 17.

 

 

 

요네하라 마리 | 마음산책 | 2015. 9?

 

원제 ロシアは今日も荒れ模樣

 

일단 습관적으로 원제를 옮겨놓긴 하지만 일본어는 완전 까막눈이라 한자 몇개만 띄엄띄엄 간신히.  그 건진 한자로 볼 때 제목은 출판사 나름의 섹시한 의역이나 마케팅을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것 같다는 짐작만 살포시 해본다.

 

지난 겨울 이후 완전히 요네하라 마리의 팬이 되어 내 취향이 아닌 소설을 제외한 그녀의 책들을 거의 다 사들이고 있는데 아쉽게도 가장 원하는 '대단한 책'은 현재 절판이고 나머지 책들을 틈나는대로 읽고 있다.

 

대체적으로 다 재미있지만 이 책은 특히 내 취향.

 

동구권 개방 초에 잠깐 머물렀던 적도 있고 신문을 열심히 보던 때라 어렴풋이나마 개방과 고르바초프, 옐친의 그 파란만장한 뉴스들의 기억이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에피소드에 연결되어 그런 것 같다.

완전히 오래된 남, 혹은 옛날 얘기가 아니라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시대를 걸쳐 살았고 어느 정도는 일원이고 증인이었던 역사의 흔적이라 더 친숙하지 싶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 묘사되던 개방 전 소련의 폐쇄성과 공산주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들은 냉전 시대 때 체제 경쟁의 일환으로 수없이 제공되던 소련의 열악한 소비재 상황과 온갖 모순에 대한 에피소드, 내가 경험했던 끝자락의 기억과 잘 연결이 된다.

수요일에 물이 다 떨어졌는데 정기적으로 새 제품이 들어오는 그 다음주 월요일까지 절대 추가 주문하지 않던 꽤 큰 동네 유일의, 부다페스트의 수퍼마켓. (내 필수품이 물이었기에 물만 기억하는 것이지 아마 다른 것들도 수요 예측 실패로 무수히 중간에 품절되거나 남거나 했을 것이다.)

저녁 6시가 되어 자기들 퇴근해야 해서 손님 받지 않는다던 프라하 중심가의 레스토랑 등.

 

물론 지금은 그런 곳은 없을 거다.

그 와중에 밑장빼기로 돈 바꾸는 관광객들 등쳐먹는 사람들과 기차역엔 배낭 관광객들 데려가려는 민박집 주인들로 인산인해였다.

당시에도 자본주의에 일찌감치 눈을 뜬 사람들과 익숙한 구체제에 맞춰 살던 사람들이 뒤섞인 혼란기였으니 가능했던 경험이겠지.

 

요네하라 마리처럼 정말 제대로 두개의 체제를 체험하고 그 어디도 완벽하게 나쁘거나 좋지 않다는 경험을 갖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실제로 경험해봤던 건 내 세대의 축복이지 싶다.

 

사설이 길었는데 각설하고, 이 책은 바로 그런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운 좋게 중심에 서서 양쪽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던 요네하라 마리의 역사 기록이다.

그녀가 직접 그런 낯 간지러운 얘기를 쓰진 않았지만 주변인들의 기록으로 보건대 마리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지목할 정도로 선호하던 우수한 통역가였던 것 같다.

두고두고 세계사 책에 등장할 그 인물들의 곁에서 보고 들은 비화 중에서 공개해도 가능한 내용들과 그녀가 러시아를 오가면서 체험했던 기억들이 정말 맛깔나게 어우러져 제공된다.

 

더불어 로스트로포비치에 관한 기록들은 내게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

중 3 때던가 호암아트홀(이 역시 확실치 않다)에서 처음 만난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다시 태어나 내가 악기를 또 한다면 그때는 꼭 첼로를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아름다운 소리였는데.

 

그녀에겐 식은 땀 나는 경험이겠지만 배를 잡게 했던 아제르바이잔의 코냑 사건을 비롯해 자신을 미화하지 않고,

비판하면서도 그 안에 가득한 애정 때문에 그 따끔함마저도 빙그레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요네하라 마리 글의 특징이지 싶다.

 

우리도 노씨 성을 가진 모 대통령 때 북방정책인가 북방외교 어쩌고 하면서 러시아 상대로 차관 제공이니 뭐니 온갖 뻘짓을 다 하면서 세금 갖다 퍼부었는데 그거 회수는 했으려나?

당시 기분이 나빴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정말 찰나의 시간 동안 러시아 앞에서 목에 힘 좀 줬던 대가로는 좀 비싼 것 같다.

 

그래도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보니 일본이 우리보다 더 호구였던 것 같아 아주 눈곱만큼이지만 위로가 되긴 하네.

물론 경제적 능력이 모자라 덜 호구였지 일본 정도의 경제력이었으면 더 호구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