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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핏줄

by choco 2019. 5. 17.

정이니 어쩌고 하는 거는 긴 시간 함께 부대껴 온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어릴 때 헤어진 부모 찾으러 오는 입양아나 자기 인생 찾아서 떠난 부모를 받아들이는 자식을 보면서 피가 땡기네, 혈연이 어쩌네 하는 것들이 있기는 한가 보다 싶음.

돌도 되지 않은 핏덩이를 두고 떠난 젊은 엄마가 있었다. 그 남편은.... 그래. 어른이 된 지금 객관적으로 볼 때 내 동생이나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사람이었다. 머리는 좋으나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몽상적인 야심가. 꿈은 있으나 실천할 추진력이나 끈기는 모자란.

여자 역시 남자 집에서 볼 때는... 그 내막을 디테일하게는 모르나 아마도 -당시 용어를 빌리자면- 양공주가 있는 격 떨어지는 집.  여자와 남자 집 양쪽에도 반대를 했지만 오랫동안 너무나 사랑해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결혼을 허락받고 금방 아이도 낳았다.  아마 그 아이 덕분에 결혼을 허락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역시 디테일한 상황은 모르지만 그 엄마는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두고 떠났다.  모유만 먹던 아가는 한동안 분유를 거부해서 엄청 속을 썩였지만 다행히 적응해서 할머니 손에 자랐고 그 젊은 엄마는 소문에 언니처럼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연락 한번 없이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아이는... 자기 아빠처럼 머리는 좋았지만 방황도 심하게 하면서키워주신 할머니 속도 많이 썩였지만 어찌어찌 대학도 졸업하고 다행히 그럭저럭 이름 알만한 회사에 잘 다니면서 아들을 끔직이 사랑하는 젊은 아빠가 됐다.  그동안 그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렇게 살던 몇년 전 외사촌이라는 누군가가 페이스북을 통해 어른이 된 이 아이에게 엄마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마도 몹시도 외로웠을 이 아이는 그 연락을 덥석 받아서 엄마를 만나러 비행기 표까지 끊었는데 당시에 한국에 무슨 전염병이던가? 유행한다는 소식에 그 엄마는 병 옮기면 안 되니 오지 말라고 연락을 한다. 

그렇게 만남은 무산이 되고 다시 몇년이 지난 뒤에 이 아이는 엄마에게 비행기표를 사주고 그 엄마는 아들을 보러 한국에 왔다.

감격적인 모자 해후인지 아니면 데면데면한 해후인지는 모르겠다.  얘도 자기 아버지를 기억하니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을 크게 원망하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비행기표까지 보내주면서 만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내게 그렇게 그립거나 애잔한 존재가 없거나, 죽을 것 같은 외로움에 짓눌려 본적이 없어서겠지.

부디 어른이 된 이 아이가 엄마 때문에 다시 상처 받지 않기를.  그 엄마는 이제는 아들에게 다시 상처 주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기를. 그런데 오늘 정황을 보아하니 후자 쪽은 그닥 가망이 없지 싶다.  울 부친과 나는 남의 험담은 속으로만 생각하지 입밖에 내지 말자는 주의인데 오늘 둘이 모처럼 의기투합해서 이견 없이 철딱서니 진짜 없다고 씹었음. 그냥 그 아이가 감정의 허기에 굴복하지 않고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갖고 적당히 교류할 수 있기를 빌어야겠다.  

내 어린 기억 속에 참 예뻤던 그 여인의 사진을 보면서 세월이 진짜 많이 흘렀구나 실감 중.  더불어 정말 핏줄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엄마가 없었기 망정이지 만약 새엄마가 있었다면 배신감 느꼈을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