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보관함에 있다가 드디어 지른 책이다. 한일을 통털어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 상품이 되어 있는 세이메이 덕분에 눈에 어느 정도는 익숙한 헤이안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귀족 여성들의 격조 높은 풍류에 대한 서술이다.
일본시 하면 하이쿠 정도나 줏어듣고 있던 내게 정교하고 폭넓게 쓰인 와카에 대한 내용과, 그 대결에서 진 시인은 충격으로 거식증에 걸려 굶어죽기까지 하는 그 히스테릭한 열정이랄까.... 자존심은 충격에 가까웠다. 끼니를 제대로 떼우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평민 여성들에게는 꿈같은 세계였을 와카를 통한 도락이며 황궁에서 횡행했던 그 자유연애 풍조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
결혼과 이혼, 의식주, 문화, 종교 등 헤이안 시대 상류사회 여성들의 생활과 풍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고 또 꽤 알찬 독서였다. 고대 여인들과 남성들의 모습에서 흔히 우리가 현대 일본인들을 규정하는 모습들이 종종 내비치는 걸 보면서 민족적 성향이라는 건 일종의 DNA 처럼 유전 정보로 내재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성장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후천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살짝 의문을 갖게 되기도 했고.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게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차를 보니까 읽을만한 내용인 것 같아서 거금을 주고 질렀는데... 책이 가격에 비해 좀 얇기는 하지만 내용의 질만큼은 만족하다. 이란 만족감은 내가 일본 역사나 이런 방면에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걸수도 있을 것이다. 좀 알거나 많이 읽은 분야는 기존의 독서를 바탕으로 오류에 대한 의문이나 교차 검증이 가능하지만 이 분야는 비교할 만한 다른 독서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모조리 내게는 새롭고 진리였다 걸 감안해야할 듯. ^^
옛날에 애들이 ~비치, ~스키, ~프로 끝나는 러시아 이름들이 너무 복잡해서 톨스토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고, 앞으로 돌아가서 이름 찾아보다 세월이 다 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 도대체 쟤네들이 이런 간단한 이름들을 갖고 왜 저렇게 헤매나 했는데 각자 눈에 쏙 들어오는 국가가 있는 모양. 얘가 쟤 같고, 쟤가 얘 같고. 이름이 헷갈려서 엄청 헤맸음. 안 그랬으면 더 빨리, 더 효과적이고 재밌게 읽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