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미제의 추억

choco 2025. 7. 31. 11:33

지금 애들에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까진 아니고 내가 어릴 때 '그때를 아십니까?'를 보던 정도의 기억 기록.

우리 동네는 소위 블랙마켓이 엄청 활성화된 동네였다.  큰 고무다라이를 머리에 인 아줌마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니면서 미제 초콜릿 등 미제 물건을 팔았고 함께 살던 이모가 월급날이면 m&m이며 키세스, 허쉬 초콜릿을 사주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리고 그런 행상 아줌마들과 차원이 다른 업장도 있었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미제 식품과 물건들을 사기 위해서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부잣집 싸모님들이 기사 대동한 자가용 타고 오던 큰 미제 물건 집이 (내 기억에만 해도) 두 군데 정도 있었음. 당연히 가게는 아니고 아파트. 그 블랙마켓 주인과 안면이 있거나 단골이 직접 데리고 와서 안면을 튼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는 보안(?)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득 쌓여있던 m&m 이나 키세스 등이며 확 풍기는 초콜릿 향기가 황홀했던 기억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른다.  슬라이스 햄이며 치즈, 지금은 줘도 안 먹는 콘킹 소세지는 얼마나 맛있었던지.  (근데 내 친구 중 하나는 자기 엄마가 박스로 사온 그 콘킹 소세지가 어머니의 맛이 되어 버려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면서 종종 사먹고 있음. ㅎㅎ)

물건 사러 가면 그 블랙마켓 주인에게 물건을 대어주는 한국인 미군 와이프 (혹은 동거녀였을 수도)들이 물건 갖고와서 계산하고 양담배 피면서 주인에게 필요한 물건 주문 받던 기억도 떠오르네.  양주며 담배, la 갈비가 제일 많이 남는 인기품목이었는데 너무 많이 사면 블랙리스트 오른다던 대화도.  쓰고 보니 난 참 별 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la갈비며 스팸, 당시엔 이름도 몰랐던 각종 견과류들(피칸, 마카다미아 이지 싶음)도 기억남.  지금도 미국 슈퍼마켓에서 파는 그 파란 동그란 통 우산 쓴 여자애 그림 그려진 소금을 본 사촌동생이 나중에 자기 집에 가서 이모네는 소금도 미제 먹더라는 얘길 했다고 함. ^^; 

이 블랙마켓과 별개로, 이모의 절친이 미군부대 학교 교장의 비서라서 8군 안에서 쇼핑이 가능했다. 놀러올 때마다 (역시 지금은 줘도 안 먹을. 코스트코에서 파는 것과 흡사한) 알록달록한 엄청 커다란 케이크며 크리스마스 때는 성탄 그림이 프린팅 된 (지금도 맛있을 것 같은)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잔뜩 든 케이크를 사주셨던 기억도 난다. 

밀가루 가득한 분홍 소세지, 전지분유에 코코아 풀어놓은 맛이던 가나 초콜릿과 롯데 초콜릿이 전부이던 세상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미제는 정말 최고였다.  아무리 학교에서 외제 쓰면 안 되고 국산품 애용 어쩌고 해도 맛의 질에서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이 화려한 문물에 대한 동경은 거의 전화번호부 두께인 크리스마스 카탈로그를 헌책방 노점에서 사서 심심할 때마다 구경할 정도로 컸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 미국에 어학연수를 가서는 어렵게 접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던 그 동경하던 문물이 집 앞 스타 슈퍼 (아직도 있으려나?)에 나가면 다 넘쳐나는 세상을 맛봄.  흔하니 금방 익숙해지고 동경하던 마음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품었던 갈증이 해소되는 건 즐거웠던 것 같다. 

르망 레이서가 대학생의 포르쉐였던 1990년대 당시 내 친구들이 '오!!!' 하던 내 썸남의 머큐리 세이블이며, 어쩌다 같이 얻어탄 사촌이 와!!! 했던 대학 동기의 링컨 컨티넨털의 위상도 지금 떠올리면 '피식' 하는 추억이다.  

현재 21세기. 아주 가끔 추억의 맛으로 m&m이나 키세스, 스니커즈가 먹고 싶긴 하지만 굳이 지갑을 열게 되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미국 현지 것과 한국에서 파는 건 맛이 다름.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다수에겐 이해받을 수 없는 미각. 😥)  미군무원 가족인 동생 친구가 가끔 la 갈비 사줄까? 칠면조 주문해줄까? 하는데 단호하게 NO THANK YOU!를 외치고 있음.  

 (나는 안 보지만) 넷플릭스나 ms 소프트 등 이미 기반이 되어버린 걸 제외하고 선택권이 있는 소모품이나 기호품에선 미제 최고!라고 외칠 건 사라져버린듯.  여전히 사랑하는 공산품은 '미스터 굿바' 초콜릿. 농산품은 요즘 한참 잘 먹고 있는 워싱턴 체리와 견과류들 정도?  

오늘 발표된 미국과 관세 협상 결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됨.  

마지막으로 덧. 근데 어릴 때도 미국 학용품은 귀한 미제를 갖고 있다는 정신적 만족감을 제외하고 좋다거나 예쁘다거나 이런 생각은 안 들었다.  미국 가면 막내 외삼촌이 항상 사오던 그 크레용.  안 부러져서 좋긴 한데(안 부러진다고 그거 가진 소수의 애들이 엄청 자랑) 지금 생각해보면 왕자파스나 티티파스보다 색깔 정말 안 예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