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두권을 주문해서 가슴이 좀 쓰렸던 책. 한권은 아기 낳고 산후 조리원에 감금(?)된 사촌동생 위문 선물로 잘 써먹었다.
이 책의 분류를 굳이 따지자면 인문 서적이다. 그러나 그런 류의 책에서 절대 찾기 힘든 유쾌함이 가득하다. 읽는 내내 혼자 낄낄거리고 또 몬도가네식 재료 -물론 다른 시대란 것을 감안하더라도-에 비위가 상하기도 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식탁과 부엌을 즐겁게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 중 하나.
천재적인 화가이고 발명가이자 음악가인 그가 요리에 이렇게 열정을 쏟았고 또 부엌일의 현대화, 기계화에 많은 시도와 연구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스파게티 국수가 그의 발명품이란 사실도 처음 알았음.
그가 식도락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보통 탐미적인 예술가들은 미각을 충족시키는 일에도 열정적이란건 익히 아는 일이니까. 하지만 직접 요리하고 -여기까지도 다빈치의 성격상 크게 놀랍지 않음- 주방의 기계화에 쏟은 그 수많은 노력을 보면 시대를 앞선 그의 시도가 놀랍기도 하고 또 재미있다.
이 책에는 다빈치가 시도했던 요리법들, 당시 모셨던 주군 루도비코가 즐겼던 것을 포함한 당시의 음식, 그리고 주방을 개혁하기 위한 그의 복안과 온갖 기계의 설계도가 가득하다.
다른 시대를 엿보는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지만 -극히 일부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돈을 준다고 해도 먹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아무도 이해 못할 기계화된 세상을 꿈꿨던 다빈치가 일으킨 일련의 그 화려한 소동들. ㅎㅎ 간단히 얘기해서 뒤집어진다.
중요한 잔치를 앞두고 주방을 폭파시켜버린 무완성되거나 작동에 실패한 기계들. 루도비코를 익사시킬 뻔한 냉온수가 나오는 욕실 -물론 이건 늑장을 부린 공사 책임자 줄리아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루도비코의 결혼식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빵으로 만든 궁전. 스포르짜 성의 사람들이 다빈치를 부엌에서 떼어내기 위해 노력
이 말썽꾸러기 천재를, 자신이 실각하는 날까지 다독이고 계속 기회를 준 그를 보면 형을 독살하고 밀라노 대공 자리를 차지한 음모가의 이미지가 상당히 희석된다.
당시 지중해에 흔했다는 이유로 지금과 달리 서민들을 위한 싸구려 재료 취급을 받았던 철갑상어와 물개에 관한 부분에서는 어느 역사책에도 알려주지 않은 당시의 생태 기록까지 파악하게 되는 부수 효과도 있었음.
내가 정확히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편집의 실수인지 모르겠는데 다빈치의 메모가 나오기 전 앞쪽에 전체 내용을 요약한 부분에서 프랑소와 1세가 앙리로 잘못 표기된 것 같다. 다빈치는 말년에 프랑스에서 프랑소와 1세에게 의탁했는데 웬 앙리?
그걸 제외하고는 풍부한 스케치 -다빈치가 운영했던 술집의 메뉴판까지 비롯해서-가 더해진 책 내용에다 예쁜 하드커버의 책 편집도 마음에 든다.
상상력도 그랬지만 식성도 다빈치는 상당히 현대에 가깝다. 요즘식으로 따지면 채식주의나 웰빙 식단을 선호했다고 할까? 배를 채우는 것이 주목적인 당시 시대에서는 너무 앞서갔던 게 탈이겠지. 하지만 그가 요리에 일생을 헌신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것은 인류의 입장에서는 다행.
볼 것 전혀 없다는 말에 밀라노에 두번이나 갔으면서도 과학 박물관에 가지 않았는데 언젠가 다시 밀라노에 가면 그곳에 꼭 들러봐야겠다. 다빈치가 창안한 그 각종 부엌 기구들을 구경해봐야겠다. 그리고 음식이 주인공이고 예수와 12제자는 배경이었다는 최후의 만찬도. ㅎㅎ
책/인문(국외)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책이있는마을 | 2005.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