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와 연표 등등을 빼면 120여쪽의 얇은, 거의 팜플렛 수준의 두께임에도 진도가 정말 안 나갔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나란 인간은 사실을 잽싸게 파악하고 거기서 쓸만한 것을 집어내는 것은 제법 빠르지만 사유와 사고가 필요한 글읽기와는 친하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걸 새삼 확인했음.
동물의 생태에 관한 아주아주 재미있는 글을 쓰는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삶, 그리고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노학자의 철학적 메시지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읽어나갈 것을 요구한다. 라디오에서 방송했던 내용을 정리한거라고 하던데... 이걸 듣고 출판을 요구했다는 사람들의 수준이 솔직히 놀라웠다. 아님 읽는 것과 듣는 것은 또 다른 전달력이 있는 건가?
여하튼 아동용 철학 서적 수준의 사유를 요구하는 책도 피하는 내게 갑자기 떨어진, 너무나 버거운 숙제였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용의 수준을 폄하할 생각은 없음. 자기가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 꼬아서 쓴 글이 아니다. 그리고 제일 뒤에 스스로 이 여덟가지 죄악에 대해 정리를 해놨는데... 그게 일종의 족보였다. ㅎㅎ;
4쪽으로 요약된 내용을 읽으면 그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엑기스 파익이 됨. 그 부분을 먼저 보고 앞부분을 봤다면 좀 더 쉽게 다가오지 않았을까도 싶음.
1971년에 나온 책이라는데 2005년인 지금 읽어봐도 사실 여부가 뒤바뀐 한두가지 학문적 연구 결과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세월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어령 교수가 세월이 지나도 빛이 나면서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글이 있다는 얘기를 잠깐 했는데... 그런 글은 꼭 문학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번역자의 구구한 신변잡기가 아닌 친절한 배경 설명과 후기가 전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됐고 그리고 콘라트 로렌츠의 꽤 자세한 연보도 재밌었음. 그가 나찌스 당원이었다는 사실에 한순간 허거걱!!! 새와 물고기, 동물을 키우고 관찰하는 사람과 나찌스가 동일인? 집단 광기란 정말 무서운 것인가 보다. 그가 8장에서 제시한 세뇌 가능성이란 얘기와 이 경험담은 연관성이 있을까?
어디 다서 물어볼 곳도 없지만... 본문이 아닌 연보(^^;;;;)에서 또 궁금한 것 하나. 분명 1927년 그레틀 게브하르트와 결혼했다고 나왔는데 1986년 아내 마가렛 로렌츠 박사가 죽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레틀과 결혼했어야 할 시기에도 아내였음을 시사하는 상황 설명. 그레틀 마가렛인가? 이름이나 연도에 유달리 집착하는 내게는 계속 걸림.
시험에 안나오는 부분만 열심히 본다는 모친의 구박이 갑자기 떠오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