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부터 노빠도 아니면서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패닉 상태였다. 사람 만나서 먹고 웃고, 회사 나가서 회의 다 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글은 다 합쳐도 원고지 한두장 분량이나 될까? 급한 마감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마감이 있었다면 펑크까진 아니었겠지만 형편없는 퀄리티가 나왔을듯.
좀 더 생각이 정리된 다음에 쓸까 했지만 지금은 일단 날 것을 기록해놓는 게 필요한 시점이지 싶어서 거칠더라도 5월 29일의 감정과 상념을 기록해놓으려고 한다.
화요일에 시내에 회의하러 나간 김에 덕수궁에서 조문을 하려고 했는데 일부러 뒤로 늦춰 잡은 회의가 당겨졌다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돌아가느라 조문을 못 했다. 그 이후엔 시간이 계속 어정쩡. 그렇다고 정부가 만들어 놓은 서울역이나 역사박물관으로 가기는 싫어서 그냥 패스하고 오늘 노제에 갔다.
아침에 나갈 준비하는데, 내 분류책에 딴나라당 지지자로 기록된 감독이 전화가 왔다. 오늘 뭐하냐고 묻는데 노제 간다고 하면 피차 분위기 싸해질까봐 그냥 바쁘다고 했더니 오늘 같은 날 시청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지금 간다고 가서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왔을 때 솔직히 좀 놀랐다. 그 전화를 받으면서 예상보다도 사람들이 엄청 많겠구나 했는데 역시나. 중간중간 여기서 누군가 한명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압사로구나라는 그런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내 옆에 서있던 아저씨들 말마따나 모모씨가 죽었으면 돈 준다고 해도 안 나왔을 사람들. 돌아와서 사진을 보니까 이한열군 추모행렬 이후로 시청 주변이 그렇게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건 처음이지 싶다. 그 이후로 정말 뜨거운 6월이 펼쳐졌는데... 지금 이 슬품과 분노가 어디로 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과 오버랩하면서 떠올리는 건 아마 내 혼자만은 아니었지 싶다.
경찰 추산 12만명, 다른 언론사들에서는 40만에서 50만을 추정하고 있던데 동조자로 그 안에 서있음에도 그 인파의 숫자와 진심어린 분노와 슬픔에 공포를 느꼈을 정도니... 그야말로 막대기 하나 꽂을 틈도 없이 시청광장과 주변을 가득 메운 그 노란 인파를 보면서 청기와집 세입자 일당들의 간담이 서늘했을 듯. 물론 저 일당들은 지금쯤 모여 앉아서, 혹은 각자 홀로 어떻게 이 노란 무리들을 때려잡고 (<--달래는 게 아님) 자자손손 해먹을까를 열심히 궁리하고 있다는데 지금 하고 있는 특집 다큐 2편 원고료를 다 걸겠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꽤 많던데 이 기억이 그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남을지 궁금했다. 어릴 때 받은 인상이라는 게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 걸 감안할 때 오늘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이들의 단순한 두뇌 회로에는 내 어린 기억에 아주 아주 사소한 일로 전두환=나쁜 놈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명박=나쁜 놈, 노무현=좋은 놈으로 입력이 되지 싶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참여 열기의 절정기를 비껴간 덕분에 가투는 고사하고 학내 집회 제일 끄트머리에도 한번 서보지 않았던 나 같은 인간마저도 거리로 나오게 한 이 정권의 마력(정말 마귀의 힘이다. -_-)에 대해, 1학년 때 가기 싫은데도 질질 끌려간 전체 MT 때 배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외하고는 소위 노동가요나 운동가요는 하나도 모르던 내게 이 나이에 상록수 같은 새로운 노래를 학습시켜주는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해야하나?
문제는 이제부터. 벼랑 끝에 밀려서 이제 죽음만 남았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대신해서 노무현 전대통령이 몸을 던져 시간을 벌어준 셈인데... 죽음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이 마지막 기회(다른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음)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미지수이고 솔직히 좀 암담하긴 하다. 솔직히 작년에 촛불집회 나온 사람들만이라도 투표를 했으면 공정택이 교육감이 되는 사태는 없었는데... 그 열기의 와중에서 나온 결과는 정말... -_-+++
그래도 무력감과 애도는 가슴에 묻고 머리는 차갑게 식혀서 다음 길을 모색해야한다. 그 안에서 나같은 기타 여러분의 역할은 의미없는 한표 뿐이라는 무기력에서 벗어나 다단계처럼 표를 끌어모으는 것까진 불가능하더라도 떠도는 표가 저 일당들에게 가지 않도록 하는 것 정도?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는 건 어렵지만 그 1/10의 노력만으로도 적의내지 비호감을 갖게 하는 건 가능하다. 그걸 제일 잘 해온 게 소위 조중동이지.
작년에는 이메가 일당들을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잣대로 판단해왔기 때문에 좀 혼란스러웠는데 1년을 지켜 보니 이 사람들의 패턴은 나처럼 통찰력 부족인 사람의 눈에도 훤하게 보인다. 올 초인가 유행했던 그 플로어 차트도 필요없다.
너희는 떠들어라.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 오로지 나 자신과 이익을 공유하는 동업자들을 위해서.
친손자를 임신한 며느리도 굶겨 죽인 서태후가 광서제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그녀도 죽을 거라는 점술가의 예언 때문이었다.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광서제만큼은 죽이지 않았다. 찝찝하기도 했겠지만 어차피 살려놔도 큰 위협이 되지 않기도 했으니 그랬겠지. 그 점술가가 정말 신기가 있었는지 광서제가 홍한 바로 다음날 죽었다.
강대한 청나라를 완전히 말아 먹었다고 욕을 엄청 먹기는 하지만 권력을 잡고 죽을 때까지 지켜낸 능력 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여인이다. 말 안 듣는 광서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도 난 같은 맥락에서 본다. 절벽에 세워놓지만 밀지는 않는 것. 그런데 요즘 저 정도 머리도 못 쓰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정말 불행히도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메가 일당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희생도 망설이지 않는다. 가장 두려운 건 집권 2년도 안 된 저들에게 남은 카드가 이제 딱 한 장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온 패턴으로 봐서 국민들이 죽거나 말거나,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북한과 국지전이라는 카드를 쓰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을 텐데... 미국이나 중국이 원치 않으면 전면전까지는 아니겠지만 모든 일에는 통제할 수 없는 우발적 상황이라는 게 존재하니... 10월 재보선 때 쓰기엔 아까울 것이고 (그때 써도 놀라지는 않겠음) 아마도 내년 지자체장 선거 때가 되겠지.
여하튼 오늘 노제를 보면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추가가 됐다.
난 착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굉장히 중요시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존중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태어난 내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때문에 29만원 아저씨나 지금 청와대 세입자의 부고를 들으면 속으로는 모 헤비메탈 그룹의 대표곡 제목과 류승완 감독의 가장 최근 영화 제목을 외치겠지만 겉으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예정이었다.
29만원 아저씨가 돌아가면 위의 본래 계획대로 할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청와대 세입자분에 대해서는 약간만 수정을 해야겠다. 지금 세입자분이 2005년 광복 50주년 때 정부에서 하는 광화문 행사를 엿 먹이려고 바로 몇백미터 아래 시청에서 서울 시향을 앉혀놓고 대대적인 행사를 연 일이 있다. 그때 수백명의 합창단을 동원해 칸타타를 연주했는데 부고를 들으면 곧바로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그 곡의 절정부를 감상해 주기로.
지난 일주일 동안 먹은 욕만 모아도 지구 멸망은 물론이고 우주 멸망의 날까지도 충분히 사실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건 모르니 그날을 위해 좋은 거 잘 챙겨먹고 열심히 돈 벌면서 살아야지. 혹시라도 내가 먼저 가면 위에서라도.
[#M_더보기|접기|그 곡의 절정부는 '만세'라는 가사가 수없이 반복된다. 세다가 포기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