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골치를 썩이던 일이 어쨌든 해결이 되니 이제 좀 끄적일 기운도 난다.
1. 머리를 가장 복잡하게 하던 건 너무나 예민하신 서브작가님(-_-;;;)과 PD의 충돌.
중간에 끼어서 완전히 양쪽 다의 불평불만을 받아들이며 달래는 나날들이었는데 결국은 서브작가가 관두는 걸로 귀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뛰는 사람들의 심정이 정말 백분 이해됐었다. 당장 다 엎고 가겠당는 애 달래서 6월 말까지 앉혀놓고 후임 고르느라 또 한참 골머리를 앓았다.
우리가 청운을 꿈을 안고 방송 바닥에 들어오던 때...라고 하니 내가 엄청 먹은 것처럼 느껴지긴 하는데...^^; 는 드라마나 쇼 코메디로 확실히 진로를 잡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상당수가 멋진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꿨고 다큐 자료조사나 막내 모집에 박이 터졌었는데 그 시절이 갔다는 걸 이번 구인을 해보면서 알겠다.
다큐라는 맨땅에 헤딩인 것도 모자라 생명공학이니 더더욱 쉽게 다가서기 힘들었겠지. 그래도 이렇게 지원자도 적었던 적은 참 처음이었음. 근데 몇 안 되는 지원자들을 어제 면접했는데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든다는 아픔이... -_-a 정말 잘 키워주고 싶은 정이 가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내가 편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경험이 많은 친구를 낙점했다. 이력서 다 갖고 있으니까 주변에 막내 구한다는 얘기 있으면 토스해줘야지~ 이렇게 양심(? ^^)을 위로 중.
이제 남은 기도는 다음주부터 인수인계 받으러 나오기로 한 이 친구가 제발 하루나 이틀 나오고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해주길. 벌써 우리 옆팀에서는 2명, 또 다른 팀에서도 한명의 막내 작가가 달아났다.
아예 연락 두절인 친구들은 그렇다지만 나름대로 사퇴의 변을 남기는 친구들의 핑계는 어떻게 그렇게 한결 같은지. 10명 중 7~8명이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시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나머지 2~3명은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 있어야 한다는... -_-a 그래도 나름대로 작가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면 좀 독창적인 변명을 만들어도 좋으련만. 그러고보니.. 예전에 내 메인 작가도 교통사고 났다는 핑계로 잠적했었다. 문병가겠다고 전화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때는 나도 참 순진했었지. 그 덕분에 그 큰 프로에서 입봉을 했으니 나는 고맙다고 해야겠지만 PD는 정말 앞이 깜깜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ㅎㅎ;
씁쓸한 건 막내 작가의 월급은 IMF 때 깎인 그 수준에서 단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우리 때는 꾸준히 참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요즘 방송판 돌아가는 걸 보면... '한 3년 죽었다 생각하고 고생하고 버티면 여자 직업으로는 괜찮다.'고 한 내 얘기가 애들한테 사기 치는 게 아니어야 할 텐데.
2. 매년 5월에서 6월에 유방암 검사를 하는데 올해도 다행히 별 이상없다고 함.
이 선생님께 4년인가 5년째 계속 다니고 있는데 매년 검사 잘 받으러 온다고 칭찬 받았다. 내 동생도 5월 말에 검사받으러 가서 칭찬 받았다고 함. ^ㅅ^ 우린 사기꾼의 향기가 풍기지 않는 한 전문가가 시키는대로 꼬박꼬박 하는 주의라서 검사 때 됐다는 엽서 오면 예약하고 찾아가는데 안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모양이다.
하긴...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절친 ㅂ양. 몇년 째 유방암 검사 좀 받으라고 내가 얼굴 마주칠 때마다 입이 닳도록 노래를 하는데 '알았어~'라고 대답만 하지 아직도 안 가고 있다. 다음 주에 만나면 붙잡아 놓고 내 눈앞에서 예약을 시켜야겠음.
근데 본래도 5,6월에는 검사 받느라 카드비 지출이 장난이 아닌데 올해는 뽀삐까지 더해서 완전히 병원비 청구서에 묻히겠다. ㅠ.ㅠ 여기서 더 고장나지 말고 잘 굴러가야 할 텐데.
3. 스트래스 심하게 받을 때 베이킹의 혼이 불타오르는 병이 있는데 요즘엔 심신의 에너지가 쪽쪽 빨려나가는 형편이라 마음이 손으로 옮겨지질 않는다. 마음이 심란할 때 한번씩 복습해주는 초원의 집을 읽다가 알만조가 핫케이크를 구워 시럽을 뿌려 먹는 장면에서 삘이 완전히 받아 핫케이크를 구워 먹었음.
핫케이크를 두고 베이킹이라고 하면 비웃겠지만 요즘 내 컨디션으로는 그것도 나름대로 크게 마음 먹은 작업. 오랜만에 해서 첫 장은 살짝 태워먹었지만 도톰하니 환상적으로 구워졌다. 거기에 메이플 시럽을 끼얹어 촉촉하게 먹으니 초원의 집이 절대 부럽지가 않음. ^^
올해 캐나다로 이민간 동생 친구가 선물로 진짜 단풍나무 수액을 졸여서 만든 메이플 시럽을 보냈다니까 그게 도착하면 또 한번 구워먹어줘야겠다.
4. 이미 그 업계를 떠났지만 그래도 탄생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 한예종에 대한 그냥 기억들을 좀 끄적여 보자면...
내가 우리 대학교에 갈 때 꼭 강의를 들어보고 싶었던 교수님이 몇 분 계셨는데 그 중 한분이 한예종의 초대 교장이었고 한예종의 설계도를 그린 이강숙 교수님이었다. 예고 때 음악사 강의를 해줬던 ㅈ선생님이 바로 이강숙 교수님의 직계 애제자이다보니 그분 얘기를 많이 해주셨고 당시 내게 그 대학에 가고 싶은 성취 동기 중 하나였다.
작곡이나 이론과가 아닌 학부생들에게는 서양 음악사 강의를 하셨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셨다고나 할까? 나의 현대 음악 애호를 완성시켜준 것은 강석희 교수님이지만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하던 고음악이나 현대 음악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바로 이강숙 교수님이다. 음악을 보는 지평, 예술을 보는 시각을 넓혀주는 그런 강의였는데... 한예종의 교장으로 가시면서 그분의 수업을 더 듣고픈 내 꿈은 날아가 버렸었다. 더불어 애제자였던 ㅈ 선생님은 이론과 교수로 데려가고, 또 김남윤 교수님 등 우리 학교에서 날리던 교수님들 여러분이 한예종으로 옮겨가셨다.
지금이야 한예종을 크게 쳐주지면 그때 옮겨가시던 선생님들의 상당수는 정말 국가의 부름을 받아 울며 겨자먹기로 옮겨가는 그런 상황이었고, 한예종은 공부는 못 하지만 실기는 아주 뛰어난 학생들. 음악 쪽에서는 주로 연대에서 소화해주던 그런 컨셉의 학교였다. (연대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필기 성적 커트가 있었던 우리 학교와 달리 연대는 실기가 아주 우수하면 필기는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가 좀 떨어지고 실기가 좋은 친구들이 많이 갔었다.)
이강숙 선생님이 갖고 계신 플랜이며 풍부한 교양과 안목 등을 볼 때 한예종이 안 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음악원을 시작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걸 보면서 우리도 제대로 된 콘서리바토리가 생기는구나. 언젠가는 뉴잉글랜드 콘서리바토리 같은 곳에 가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었는데.... 정말 힘들게 키운 나무를 밟아서 되지도 않는 곳에 꺾어 붙이려는 인간들을 보니... -_-;;;;
유완장과 그 일당들의 퍼포먼스야 이제는 놀랄 것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던 건 그 분해에 앞장 서는 이름에 서우석 교수님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분이 강의하던 인도 음악 연구 수업 전날은 중학교 때 한문 시간 전날처럼 매주 극도의 스트래스와 공포였지만 그래도 아는 것도 많으시고 열정도 있으셔서 존경하고 좋아했는데. (이론과나 작곡과도 아닌데 수강 신청해서 그런지 학점도 엄청 잘 주셨다. ㅎㅎ;)
어떤 의미에선 서울대에서 분리해나간 거나 다름없는 한예종 음악원의 성립 과정에서 이강숙 교수님과 개인적인 갈등이라도 있으셨나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까지 든다. 아니라면... 완장을 옹호해주시는 저 변신은 정말 참담하다는 표현밖에는 쓸 수가 없네.
5,. 서우석이라는 이름에 참 씁쓸하고 심란했는데 한완상,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파시즘 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다시 받았다.
한완상 교수님의 사회학 강의도 내가 대학에 가면 꼭 들으리라! 결심했던 것 중 하나였다. 대강의실에 수백명이 꽉꽉 모여 앉아 들었던 강의. 3학점 짜리가 B0가 나와서 (ㅠ.ㅠ) 평균에 치명타를 입혔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비판적 지식인, 반체제 지식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분이라 굉장히 투쟁적인 이미지와 사자후를 기대했는데 의외일 정도로 조근조근하셨다. 지지자들마저도 불편하게 하는 지나친 강경함이나 큰 목소리가 아니라 작은 목소리. 어조도 강의 내용도 아주 은근하고 세련되면서도 그 안에 예리한 비판 의식이 있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 사회에서 작은 목소리더라도 양심이 되면,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존재가 있으면 주변은 변할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를 주셨다. 깃발이나 짱돌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가지 않더라도 작으나마 세상에 이익을 주면서 함께 공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면죄부를 그분의 수업에서 받았기에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자기 안위적인 내 그릇상 국가나 사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거대한 칼날은 될 수 없지만 내 주변의 악순환이나 부조리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6. PD 수첩 작가 이메일 공개 라... 이 정도면 하다 하다 이젠 별 지X을 다 한다는, 우리 모친이 정말 최악 중에서 최악의, 구제 불능의 인물이나 사건에게만 붙이던 그 표현말고는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참고로 저 표현은 내가 기억하기에 3번도 들은 적이 없다. 우리 모친은 '새X'가 아니라 '자식' 도 엄청난 욕으로 취급하고 이 단어가 우리 집 지붕 아래서 나오면 엄청난 응징을 가하셨다.}
노통을 그렇게 보내고, 정신 차리는 건 아예 바라지도 않고 몸이라도 좀 사리나 싶었더니 역시나. 쥐와 그 일당들은 구제불능이라는 걸 여실히 증명해주는 한 판인데... 지인들과 주고 받는 이메일도 명예훼손 등의 증거가 되는 세상이라면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쓴 게 뭔가 꼬투리가 잡히면 이메가, 청기와집 세입자, 딴나라 일당, 사이코 패스 등등의 단어가 빛나는 내 블로그는 완전히 증거의 바다가 되겠군.
3년 뒤에 신 내려서 글 쓸 작가들 우리 바닥에서 정말 많을 것 같다. 하긴, 벌써부터 그날을 준비하면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시청이나 시내로 나가 현장 찍어 놓는 감독들도 있으니 굳이 공중파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게 장난 아닐 듯. 나도 한 꼭지 끼어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명을 하면서 버텨야지. 그때 부디 내게 사법부를 내려주시길... ^^
7. 구글 메일이랑 블로그 계정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