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그때 IMF 터지기 직전 관련 부분들을 보니까 지금 모습들과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한번 옮겨와 본다. 초벌본이니까 글이 거칠고 오타 등이 많은 것은 감안하고 보시길. 그냥 IMF 전에 이런 일들이 지진이나 화산 폭발의 전조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상황 파악 정도만 하시고~
지금 보면 그때 IMF 터지기 전까지 주요 사건을 이렇게 말로 풀지 않고 일지들을 표로 좍 정리를 해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솟는다.
왜 정리를 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많은 사람들은 1997년 11월 21일 전격 발표된 IMF 구제금융 신청을 IMF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IMF 시대를 알리는 경고의 목소리는 이미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던 1996년부터 해외 금융 시장과 경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도 높은 구조 조정과 정치와 경제의 투명성이 높아지지 않는 당시 상태에서 호황은 전반적인 세계의 경기 호황 덕이지 결코 한국의 경쟁력이 아니라는 경고. 하지만 이런 ‘사실’을 전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고 간혹 그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는 경우도 정부를 비롯한 낙관적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철저한 비판의 대상으로 아무 곳에도 발붙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보들의 천국’ 속에서 1997년을 맞는다.
1997년은 계속 일시적 처방으로만 지속되어 왔던 한국 경제의 문제가 이제 감싸안기와 덮어주기의 한계를 드러내고 곪은 부분이 일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정경 유착 불패와 대마불사. 30년 이상 한국 경제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모범 답안처럼 여겨졌던 이 두 가지 신화는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부도의 부도를 내면서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다.
과거 수차례의 정경유착 의혹에도 불구하고 불사조처럼 부활했던 한보 그룹은 주력 산업이자 빚으로 굴러가던 한보철강이 10조원의 부도를 내자 급속하게 무너졌고 아슬아슬하게 지속되어 왔던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IMF를 예고하는 서막.
한보의 침몰은 한보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한보를 시작으로 한 거래 기업들의 부실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제일 은행은 결국 외국계 은행에 인수된다)
온 나라를 들끓게 한 한보 철강의 부도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97년 3월 19일에 삼미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4월에 국내 굴지의 주류 그룹인 진로, 5월에 대농, 한신공영 등 국내외에 나름대로 탄탄한 신인도를 쌓고 있던 중견 기업들의 부도가 줄줄이 터지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외 투자자들과 금융 기관들은 한국 경제의 흔들림에 의구심은 갖고 있었지만 성장 잠재력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망론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7월 16일 한보로 시작된 기업들의 부도 파문을 모두 뛰어넘는 핵폭탄급의 대형 사건이 터진다. 바로 97년 당시 재벌 순위 8위에 국내 2위의 자동차 회사인 기아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 역시 기아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기아에 부도유예협약에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시점에 외국은행들은 한국을 투자 위험국으로 지목했고 가까운 홍콩과 일본의 금융가에선 한국의 파산 위기에 대한 내용의 보고서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외환위기설이 정가와 재계에 나돌면서 언론에서도 간간히 이 위험에 대한 경고성 칼럼이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당시 김영삼 정권은 외환 위기설을 10월 1일에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해외 정보에 느린 평범한 대다수 국민들과, 스스로 그렇게 믿었는지 아니면 믿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외환 위기는 절대 없다고 단언한 당시 관계자들을 제외한 금융가와 대기업들은 이미 비상 체제에 돌입해 있는 상태였다. 기아 사태에 대한 한국 경제의 명확한 해법을 기대했던 해외 자본들은 ‘산업은행 출자회사 형태의 공기업’으로 전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채권 발행을 거부하는 것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명확히 밝힌다.
그리고 10월 중순부터 무디스 등이 잇따라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했고 외국 금융 기관들은 우리나라 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다. 한국 경제를 비관 적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9월에 700선을 하향 돌파한 주가는 10월말에 400선으로 추락해 이제 경제 불안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한 상황.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국민들은 아무도 IMF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고, 아니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 세상에 IMF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기아 사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부도 도미노가 다시 시작된다. 증권가에 해외에서 떠돌던 대기업 연쇄 부도설이 이제 현실로 나타난 것. 97년 11월 1일 국내의 대표적인 토종 제과 업종인 해태그룹이 계열사 화의와 법정 관리를 신청했고 바로 사흘 뒤인 4일에는 역시 대표적인 유통 그룹 뉴코아가 화의를 신청한다. 경제 상황에 불안을 느낀 금융기관들은 앞다퉈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나도는 외환위기설과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11월 3일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3백 5억 달러로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 특히 선물 시장과 외환 시장에 관련된 딜러들은 이 수치가 엉터리라고 의심을 넘어 확신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발표를 가장 믿어줘야 할 해외 금융 기관들은 한국 은행의 외환 보유고 발표와 상관없이 차입금 회수에 박차를 가했다. 외환 보유고가 넉넉하다는 발표가 있은 지 1주일도 안된 10일에 달러대 원화 환율은 사상 최고치인 1000원을 경신했다.
이 때 종합금융사들은 외화 차입금을 갚기 위해 한밤중에 한국은행에서 수억달러씩 자금을 빌리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고 정부는 종금사에 대규모 자금 지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디어 한계에 달한 종금사들은 11월 13일 한국은행에 외환부도를 막든지 부도들 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최후 통첩을 했고 시중은행장들도 정부가 직접 나서 외화 차입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다.
당시 한국 은행의 상황은 열흘 정도 사이에 1백억달러 이상의 외화를 방출했기 때문에 11월 3일의 발표와 달리 가용 외환 보유고는 수십억 달러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가운데 정부는 여러 국가에 외채 차입을 시도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채권 국가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미국은 IMF의 지원을 받을 것을 종용했다.
11월 6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는 모여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상환하고 외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IMF 구제금융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김인호 수석은 이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7월 이후 줄줄이 대기업들이 부도 사태가 일어나면서 해외에서는 이미 계속 경고하고 있던 외환 위기가 11월 초에야 비로소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통령이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13일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IMF 캉드쉬 총재의 방한을 요청한다. 그리고 강경식 부총리는 다음 날인 14일에 이런 내용을 다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11월 16일 캉드쉬 총재가 극비리에 방한해 강 부총리와 만나 지원을 논의했고 다음날 바로 프랑스의 경제 전문지에 한국이 IMF에 400억 달러의 지원을 요쳥했다는 보도가 나간다. 그 보도는 재경부에 의해 바로 부인됐지만 환율은 이때부터 매일 제한폭까지 상승해 거래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는 11월 19일에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2.25%인 환율의 하루 변동폭을 10% 로 확대했지만 이 변동폭을 적용한 첫날 역시 거래중단사태가 빚어졌다.
19일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의 경제팀을 경질하고 임창렬 경제 부총리를 새로 임명한다.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경제팀이 교체되던 날 전임 강경식 부총리가 발표하기로 했던 종합금융대책에 IMF 구제금융 신청 내용을 제외하고 발표하지만 바로 원화의 급격한 평가 절하 사태가 일어나면서 외환 시장이 사실상 마비된다.
그리고 11월 20일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가 한국을 방문해 임창렬 신임부총리와 지원 문제를 협의하고 바로 다음날인 11월 21일 오전 10시 임창렬 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11월 22일에 정부는 IMF에 구제 금융을 공식 요청하고 바로 다음날 IMF 실무 협의단이 구성되어 협상에 들어간다.
IMF의 지원이 발표된 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하지만 날마다 추락하는 국가 신용 등급에 2000원대까지 치솟는 환율. 국민들이 믿고 신뢰하던 중견 기업들의 줄줄이 부도 도미노 사태와 그 여파로 이어지는 대량 실업. 한마디로 총체적인 국가 위기였던 IMF는 경제에 대한 파장도 컸지만 가장 큰 상처를 준 부분은 바로 한국 국민의 자존심이었다.
세계 11위의 무역대국, OECD 가입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아시아의 용으로, 선진국이 눈앞에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득했던 우리 국민들은 이제 눈에 쓰고 있던 장밋빛 안경을 벗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부도가 난 국가의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쓴 게 2003년이었던가? 조만간 이메가 일당의 영향력이 사라지면 누군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를 정리할 텐데 그럼 정말 이걸 능가하는 수준의 앗싸리판이지 싶다. 말이 좋아 통화 스와핑이지 결국 돈 떨어져서 급전 융통해 온 거잖아. 그 급전을 얻어온 곳이 IMF냐 미국이냐 오로지 그 차이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