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제를 너무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제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일이었다는 사실도 잊어먹고 지나갔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진압과 학살 장면이며(정말 너무나 끔찍해서 안 보고 싶었다. 차라리 픽션이었음 자기 최면이라도 걸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ㅜ.ㅜ 일 때문이 아님 끝까지 못 봤을 것 같다. 아니 아예 시작도 안 했겠지.) 광주에 대한 자료조사와 취재를 하면서 막연했던 인간으로서 분노가 내게는 차분하게 지식으로 정리되고 객관화가 됐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문학의 힘이 참 강하면서도 위대한 게... 월남전은 베트콩과 싸우기 위해 우리 국군이 가서 용감하게 싸웠던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컸던 아이가 그 전쟁의 이면을 처음으로 느끼고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게 중학교 때 읽은 머나먼 쏭바강과 아마 고딩 1학년 때 동네 이동문고에서 빌려 읽은 무기의 그늘 두 소설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광주는 오래된 정원으로... 광주가 전면에 나오지 않고 잔잔하게 깔려있는 비극의 배경이었기에 더 와닿고 여운이 강했던 것 같다. 이런 수준 높은 선동(? ^^)의 대가가 어용의 길에 서지 않고 있단 것에 우린 감사해야 함.
작가의 인간성과 예술의 완성도는 완벽하게 별개란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인 황석영 선생님의 광주에서 인터뷰를 옮겨본다.
광주 항쟁 관련 인터뷰 발췌
3750 황-저는 유감스럽게도 항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저기 저 녹두서점 있 는 밑에 우리 문화센터 민주문화센터를 만들려고 지하실에 소극장을 만들 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명기기를 사러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그게 5월 16일날이야
5월 17일이 금요일이었고 5월 18일이 토요일인가 그래요
003821 5월 17일날 돈을 받으러 출판사에 갔는데 월요일날 주겠다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돈을 받을라고 월요일까지 거기 있었는데 신촌 근방에서 5월 18일 저녁인가 5월18일 저녁이지 신촌근방 술집이 있는데 후다닥닥 떠나가더니 왠 아이한테 연락이 왔어요
3852 지금 학생회장단들이 이화여대 모여 있다가 거기를 급수해서 다 체포해 갔 다 친구들 선배들 다 전화했더니 다 잡혀 갔어 김대중 잡혀 가고 고은씨 잡혀가고 후배들도 몇 명 잡혀 가고 그래서 인제 상황이 급전 했다는 걸 알았죠
3915 광주에 전화를 했더니 광주에서 여기서도 다 잡혀갔다
그때 이미 일이 시작 된거야 잡혀갔으니깐 내려오지 말고 추후를 봐라
20일이 되었을 때는 내려갈 수가 없었지 사방이 다 포위가 돼서
3934 서울에서 그 때부터 지역에서 올라오는 소식들이 그걸 좀 알려야하니깐
신문에 한줄도 안나니깐 문익환 목사님 동생인 문동환 목사님이라고 있는 데 그 목사님이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를 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랑 건물 이 비어 있었어요
4003 그래서 지금은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허병선 목사 등등해가지고 거기서 유인물을 만들어서 서울 지역에 뿌리고 그런 역할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며칠동안 했어요
이미 광주는 살육의 소식이 맨날 올라왔어 며칠 있으니깐 빠져 나온 사라 들 도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
4036 그래서 후배들을 사방에 찢어서 서로 안 맡을라고 하잖아 무서우니깐
여학생들은 카톨릭 수녀원으로 보내고 어른들 경우 내 친구 화실 같은데 박아놓고 유난봉이는 우리 마누라 선배 운영하는 학원 사무실에 박아 놓고 한 20명을 흩어서 그거를 몇 달 동안 생활비를 내고 그러니깐 거덜이 났 네...
4118 그러다가 6개월 정도 지난다음에 내려왔어 내려왔는데 아무도 없어 다 잡 혀가고.. 나는 초창기에 예비군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양림동 집에 합수부 애들이 쳐들어 왔거든 8명이 신발신고... 다 뒤지고 책 같은거 다 걷어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더 못 내려가고 그랬는데
4146 그 수사책임자가 보완대 수사책임자가 내려왔는데 그게 고등학교 동창이야 내가 그때 뒤늦게 내려왔는데 수사종결 직전에 우리집에 왔어요
그래서 나보고 너는 내 직권으로 빼주겠다 너의 대한 기록이 이만큼 있는 데 널 빼줄테니깐 그 대신 비계엄지역으로 나가라 그러더라고
4218 그 해 8월에 보따리를 싸가지고 내려왔어 제주도로 가서 거기서 1년 반 있었어 딱 갔더니 제주 지역 보완대 애들이 딱 인사를 하더라고 허가 없이 는 밖에 못나갑니다 그래서 제주지역에만 있었지 뭐...
4233 지나간 이야기지
004240 황-그런데 그때 내가 도청에서 후배들이 죽고 또 다들 잡혀가고 그랬을 때 내가 말하자면 서울에서 여기서 탈출해서 도망간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거 그거 때문에 한 10년은 마음의 짐을 가지 고 있어다는거..
4302 그게 나 뿐 아니라 광주에서 아사리 판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 짐이었어
광대 회원 중 하나였던 소원전문학교 그 친구가 밤에 광주시민여러분 우리 는 끝까지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거 때문에 광주에 숨 죽이고 있었던 광주시민들이 수십 년이 짐이었다라는거야 나도 마찬가지였죠
-> 이 양반의 결기 + 당시 나이를 생각해볼 때... 만약 광주에 있었다면 그때 도청에 남았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 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지.
어린 나도 들으며 비웃던 북한군 개입과 같은 유언비어가 21세기에 다시 살아나는 걸 보면서... 수준 높은 문학을 통한 역사 기록의 차원에서 그가 광주에 없었던 건 하늘의 안배인듯.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경상도 중노년층의 상당수는 그걸 여전히 진실로 믿고 있다는 건데... 닭 정도의 판단력만 있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듣다보니 오히려 의심하게 되는 것 같다.
모4님이나 모2님은 특히나 동감하실듯. ^^
최소한 나의 경우엔 그랬다.
이들만큼 강하겐 아니지만 이런 희생 위에 얹혔다는 부채 의식이 내게도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소설가는 살아 남은 자들의 슬픔이란 소설을 썼겠고.... 난 욕이라도 계속 하는 거겠지. ^^;
살아남은 똑똑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죽은 자식의 유공자 등록을 포기한 부모의 심정은 어떨지...
지난 5년을 거쳐 요즘까지 오면서 잘 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긴 하겠지만 그 죄책감은 평생 떨치지 하지 않을까?
비극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게 우리의 비극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