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드 다이아몬드 | 문학사상사 | 2023.3.1~4.16
도서 정가제 폐지 직전 세일 광풍 때 들여놓고 오랫동안 노려보고만 있던 벽돌 중 하나를 드디어 격파했다. ^^
코스모스, E=mc2와 함께 나름 책 좀 읽는 교양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것 같은 최면 공세를 받고 있던 책이라 들이긴 했는데 어마어마한 두께에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3.1절 날 올해의 성취로 시작했는데 날마자 조금씩 읽어나가니 정말 끝이 오기는 하는구나.
두께가 진입 장벽이지 눈에 쏙쏙 들어오지만 수탈 당한 피식민지 주민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이입이 자꾸 되다보니 중간중간 힘든 부분을 책을 놓게 되서 더 늦은 것 같다. 매일 조금씩 읽으면서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했는데,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을 실감하게 해준 독서였다.
각설하고, 이 책은 처음에 나왔을 때는 온갖 환호를, 그 이후부터는 지나친 축약과 비약이 심하다는 비판을 꾸준히 달고 다녔고 유일하게 열심히 하는 SNS가 트위터인 내 경우는 비판의 비중이 60~70%가 높은 평가를 접해왔다. 그래서 시작할 때 약간 거리감이 있었고 또 비판할 자세가 잡혀 있었지만 읽으면서 '스테디셀러인 베스트셀러는 이유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 저자 스스로 책에서 인정했듯이 13000년에 걸친 모든 대륙의 역사를 600쪽 정도에 압축하려면 간략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그걸 제대로 해냈다는 것에 나는 박수를 보냄.
좀 더 깊은 지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겐 분명 수많은 오류가 보이겠지만 큰 흐름과 맥락을 오염시킬 정도는 절대 아닌, 지엽적인 것들. 출간 후 20년 이상 흐르다보니 외부적으로 새로운 내용들이 업데이트되어서 한국과 일본 관련해서는 내 눈에도 몇개는 보이긴 했음. 한국의 벼농사 관련해서 그 기원이나 시기를 다시 재정립해야하는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나, 일본의 유명한 고고학 사기로 인한 석기 시대 연도 조정 등...은 이 책이 나온 이후니까 작가의 책임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유럽이 소위 미개한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를 점령할 때 내세웠던 우생학이나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이론이 아니라, 이 책 전체를 통해 기술된 제러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뭉치자면 '운이 좋아서' 였다는 걸 명쾌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더불어 문명의 발전 수준과 상관없이 인간은 지구 생태계에 굉장히 파괴적인 존재란 것도)
스페인의 남미 정복의 분기점이었던 피사로의 아타우알파 살해 부분은 피식민지 주민의 후예에겐 잠시 책을 덮어 쉬어가야할 정도로 가슴이 아픈 장면이었다. 유럽 혹은 미국 제국주의에 자신을 일체화시켰던 시기를 벗어난 독자로서는 책을 읽는 동안 끝없이 만약을 떠올리게 된다.
식민지 지배자와 동일시한 이 부분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자면 어릴 때부터 읽은 동화며 만화며 역사책들이 다 서구 중심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음. 백마 탄 왕자님이며 기사, 공주 다 노랑 머리에 파란 눈이고 이름도 엘리자베스니 에드워드, 사춘기 때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만화에 빠져 살았으니 내가 딛고 사는 땅이며 내 모습이 객관화가 되지 않음. 뒤늦게라도 벗어난 것이 대견하다고 자기 위로.
20세기 말, 개정판은 21세기 초반에 나온 책임에도 한국에 관한 부분들이 꽤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었던 건 한국인 독자로서 숨은 그림이나 보물 찾기 하는 것 같은 추가적인 즐거움이 컸다. 문자를 설명하는 장에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예로 들어서 한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음절이 사각형의 구성 요소이고 한 글자를 나타낸다는 설명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본 한글 설명이라 재밌었음.
이외에도 내게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기록해두자면, 항상 제일 합리적으로 좋은 게 수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내가 쓰고 있는 이 쿼티 자판보다 더 생산적인 게 이미 있지만 기존 자판의 기득권 때문에 60년 이상 더 능률적인 움직임이 좌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박사가 예시로 든, 영국에서 가스회사의 기득권 때문에 전기 공급이 늦었던 것처럼 아마도 자판 말고도 더 많은 사례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 싶다.
압도적으로 앞섰던 중국이 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나에 대한 진단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일찍부터 일체화된 통일 때문에 다양하고 집요한 시도가 불가능했다는 것. 콜롬버스가 여러 왕실에 퇴짜를 맞으면서도 계속 돌아다니며 시도해서 아메리카에 갈 수 있었고, 정화의 남해 원정이 그 수십년으로 끝나버린 것은 통일 왕국의 단호한 명령 체계 때문이었다는 건 굉장히 재밌고 납득이 가는 해석이었다.
초판이 나오고 5년 뒤에 일본 부분을 추가한 개정판이 나오는데 -내가 읽은 책도 개정판- 여기서는 첨예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을 3자 시각에서 보고 있다. 한국인인 나는 SEA OF JAPAN을 비롯해서 일본에 기울어진 시각이라고 흘겨볼 지점이 곳곳에 보이지만 반대로 일본인 입장에선 한국 입장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나설 것 같기도 하지만... 일본이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고 믿던 일본인들이 1910년 한일강제병합 때 일본 수뇌부터 '상고시대의 합당한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축배를 들었다는 장면에선 한국인으로선 혈압이 쫙 상승.
조몬(난 조몽으로 배웠던듯? 지금 표기법은 조몬인가보다), 야오이, 아스카 등등으로 이어지는 일본 문화가 머릿속에 줄줄 떠오르는 걸 보면 내가 역사를 어릴 때 참 좋아했었던 것 같다.
개정판에 덧붙여진 일본 부분에서 젤 흥미로웠던 부분은 현재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고구려어에 가깝다고 하는데 일본과 백제의 밀착된 관계를 떠올리면 오히려 일본어엔 백제어의 흔적이 더 짙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 백제가 위치했던 전라도 지역과 그들이 대거 이주한 나라 지역의 풍습이나 각종 문화에서 수백년이 흘렀음에도 가끔씩 깜짝 놀랄 정도의 유사성을 한번씩 보게 되는 걸 보면 이 부분은 파고 들면 재밌는 게 많이 나올 것 같지만... 이건 한국에서는 일본이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해 먹을까봐, 일본도 같은 이유로 서로 원치 않아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저자처럼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 3자가 파헤치는 게 이 책처럼 신선하겠지만 돈이 안 되는 부분이니 역시 요원하겠지.
책에 대한 내용보다 잡설이 많은 감상문이긴 하지만 즐겁고 뿌듯한 독서였다.
덧. 책을 많이 팔려는 의도가 역력한 '서울대 대출 1위'라는 띠지를 보면서 서울대생들은 과연 이 책을 왜 그리 빌려갔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하는 게 다 그 모양 그 꼴인가를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됨. 부러워서 괜히 헐뜯는다는 소리 들을 눈치 안 보고 씹을 수 있도록 막대한 교육비를 지원해주신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 더불어 신이라는 게 만약 있다면 -요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무신론자가 되고 있지만- '비교적 운이 좋게' 태어나게 해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