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레/단체

파리 오페라 발레단

by choco 2023. 3. 14.

LG 아트 프로그램은 어떤지 모르겠고, 대전 예술의 전당 프로그램의 단체 소개가 너무 간략해서 오래 전에 정리했던 자료 먼지 털어서 발굴.  2000년대 초반에 써놨던 자료라 외래어 고유명사 표기법 바뀐 것 등등 찾아보면 오류가 많을 것이나 귀찮아서 후반부에 최근 예술감독들 바뀐 것만 한두줄 보충해서 올림.  

Paris Opera Ballet 파리 오페라 발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레단인 파리 오페라 발레는 1661년 무용 애호가인 동시에 뛰어난 무용수이기도 했던(태양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항상 아폴로나 태양 역할을 주로) 루이 14세가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생겨났다.  최초의 왕립 아카데미는 13명의 전문 무용수로 구성되었는데 이때부터 가벼운 유희나 귀족들의 교양 정도로만 취급되던 무용이 예술도 편입되기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1671년(1669년이라는 설도 있음) 파리 오페라단의 전신인왕립 음악 아카데미도 설립하고 1713년에는 프랑신과 듀몽에게 왕립 무용학교를 설립하도록 해 9살에서 13살 정도의 빈민층 자녀들을 받아들여 무용 교육을 시작해 전문 무용수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이 무용학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용학교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이 학교들을 통해 전문 음악가와 가수, 무용수까지 아우르는 종합 예술이 가능한 예술단이 생긴다. 
 
그 시기 Surintendant des ballets du Roi는 샤를-루이 뷰캠으로 그는 궁전에서 춤출 수 있는 무용을 안무했다.  그가 물러난 뒤 그의 후임으로 Louis-Guillaume Peourt (1653-1729)와 Blondi (1675-1739)가 부임했다.  그리고 뛰어난 무용 교사인 Jean Ballon (1676-1739), 댄스 노블로 명성을 떨친 Lestang (?-1739), Louis Lasserre가 이 시기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활동하면서 발레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했다.
 
La Fontaine (1665-1736)은 음악 아카데미 무대에서 춤춘 최초의 여성 무용수로 Le Triomphe de l'Amour 초연에 등장했고 그녀의 뒤를 이어 Subligny (1666-1736), Prevost 와 Desmartins 등이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남성 무용수는 Michel Blondy와 Jean Balon 이다.
 
루이 14세는 직접 궁전 발레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1653년 Ballet de la Nuit에서는 1시간이 넘게 나오는 중요한 태양역을 맡아 춤췄고 45세인 1685년까지도 L'Eglogue de Versailles 같은 작품에서 님프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Beauchamp 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Alcidiane (1658), la Raillerie (1659), l'Impatience (1661), les Feheux, les Amours Deguisis (1664), le Mariage forc?/strong> (after Moliee), le Palais d'Alcine and Les Plaisirs de l'Ile enchante 같은 발레들이 안무되어 성공적으로 공연됐다.
 
루이 14세는 죽기 두해 전인 1713년 남녀 10씩의 무용수로 이뤄진 Reglement concernant l'Opera를 창립한다.  
 
1763년 작고 오래된 오페라 건물이 불타자(볼테르는 신의 심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무용수들은 튈르리로 옮겨가 1770년 팔라스 로얄 극장이 세워질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한다.
 
발레 개혁가인 노베르(Noverre에 설명)가 등장하는데 당시 1770년 파리 오페라 발레의 예술감독은 유명한 무용수였던 가에타노 베스트리스였다.  그는 다양한 발레 테크닉을 창시한 뛰어난 무용수였고 훌륭한 교사였지만 안무가로서의 재능은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노베르가 슈트트가르트에서 올린 작품들 메데아를 발췌해 공연하고 1775년에는 전막을 공연했다.
 
이 시기의 발레단은 막시밀리앙 가르델과 그의 형제 피에르 가르델, 가에타노의 아들 오귀스트 베스트리스, 마리 알라드, 마들렌 뒤마드, 안느 하이넬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가르델 형제와 마들렌 뒤마드는 강렬한 춤을 추는 무용수였다.  1776년 마리 앙트와네트의 요청으로 노베르가 비엔나에서 파리 오페라의 수석 안무가로 오게 된다.  하지만 무용수들은 노베르의 혁신적인 생각이나 안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배척했다.  그는 파리에서 Apelles et Campaspe (1776), Les caprices de Galathee (17776), Les Horaces (1777), Les petits riens (in 1778, 모짜르트의 음악을 이용) 같은 작품을 안무하며 1781년까지 파리에서 활동했다.
 
1781년 세운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팔라스 로얄이 발레 공연 중에 또 불타는데 도베르발의 기지로 다행히 무용수들과 관객들의 참사는 면한다.
 
그리고 새로운 오페라 건물이 왕비의 후원을 받은 르노르의 설계로 세워진다.   이 시기에 수석 안무가는 막시밀리앙 가르델과 장 도베르발이었는데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잘 융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레단 안에서는 사귈 수 없다는 규정을 깨고 도베르발이 무용수 테오도라와 깊은 관계가 된다.  1783년 테오도라가 발레단을 떠나자 도베르발 역시 그녀와 함께 떠나 보르도로 옮겨가 고집장이 딸과 같은 명작을 안무한다.
 
도베르발이 발레단을 떠난 뒤부터 파리 오페라는 막시밀리앙 가르델과 그의 동생 피에르가 함께 이끄는데 가르델 역시 무용수로는 뛰어났지만 노베르 만큼의 안무적 재질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끄럽고 자존심 강한 무용수들을 잘 다뤄 가볍고 즐거운 발레들을 많이 안무했는데 대표적인 작품들이 La chercheuse d'esprit (1778), Ninette a la cour (1778), Le deserteur (1786) 등으로 대부분 마들렌 귀라드가 주연으로 춤췄다.  1787년 그는 발에 난 작은 상처가 감염되어 죽는다.
 
막시밀리앙의 후임으로 동생 피에르가 들어오는데 그는 이후 35년간 발레단의 수석 안무가로 수많은 작품들을 안무한다. (1820년 은퇴히지만 1829년까지 발레단에 머물며 안무를 계속했다) 그의 재임 시기 파리는 혁명과 루이 18세의 퇴위 등 역사적 소용돌이 휘말리게 되는데 그는 그 모든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흐름에 맞춘 다양한 레퍼토리를 생산했다.
 
그의 대표작은 Telemaque (1790), Psyche, Le jugement de Paris (1793)로 모두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La dansomanie (1800). Psyche 는 1790년부터 1829년까지 564회나 공연된 최고의 인기 작품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역사에 남아있다.
 
피에르 가르델의 아내 마리 밀러 역시 파리 오페라 발레의 주도 무용수로 Emilie Bigottini Victoire Saulnier와 라이벌 관계였고 남성 무용수는 Auguste Vestris, Louis Milon, Charles Duport, Jean Aumer가 활동했다.
 
1820년 파리 오페라 발레는 왕의 조카인 베리 공이 공연중 극장 앞에서 암살 당하면서 또다시 옮겨가게 된다.  Rue Le Peletier의 새로운 극장은 50년 이상 파리 오페라 발레의 근거지가 된다.
 
1830년 11월 21일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악마 로베르에서 코랄리가 안무한 수녀원장역을 춤춘 마리 탈리오니의 춤은 온 파리를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만들다.  시세리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무대 장치와 어우러진 그녀의 달빛 아래에서의 춤은 그녀의 포앵트 테크닉과 함께 어우러져 발레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다.
 
탈리오니의 아버지 필립이 안무한 1832년 라 실피드로 파리 오페라는 낭만 시대를 열었고 낭만 발레의 마지막 걸작은 1842년 테오필 고티에의 시를 기초로 빼로와 코랄리가 안무한 지젤로 낭만시대 최고의 걸작이 파리에서 태어난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발레리나는 탈리오니, 카를로타 그리지, 파니 엘슬러와 루실 그란으로 엘슬러는 1836년 코랄리가 안무한 절름발이 악마를, 그리지는 라 페리를 파리에서 초연했다.
 
필립 탈리오니 이후 파리 오페라 발레를 이끈 사람은 카를로 블라스와 생 레옹이 있다.  블라스는 피에르의 제자로 파리 오페라에서 활동을 시작해 수석 안무가가 됐는데 제자 양성에도 뛰어났다.  그의 제자인 올림피아 프리오라, 나제다 보그다노바, 카롤리네 로사티, 아말리아 페라리스는 파리 오페라에서 활동한다.
 
생 레옹이 안무해 1870년 초연한 코펠리아는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기록을 가진 인기 작품으로 생 레옹은 처음에 그란조바가 이 작품을 춤추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병에 걸려 할 수 없이 쥬제피나 보자키라는 어린 발레리나가 주역을 맡았다.  발레는 성공적이었지만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보불전쟁)이 일어나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파리 오페라도 폐쇄된다.  생 레옹은 심장마비로 죽고 주제피나 보자키 역시 17세 생일 며칠 남겨놓고 병사한다.
 
1873년 Rue Le Peletier가 또 불타자 무용수들은 1875년 1월 5일 Charles Garnier 극장이 열릴 때까지 공연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발레리나는 뷔그랑으로 그녀는 1877년 마랑트의 Le Fandango를 초연하는 등 1886년 은퇴할 때까지 실비아를 춤춘 Rita Sangalli, Virginia Zucchi, Julia Subra와 함께 파리 오페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08년 새 단장으로 작곡가 Andre Messager가 임명되고 예술 감독으로 Leo Staats가 들어와 생상의 음악을 이용해 JAVOTTE 를 안무하는데 이때 잠벨리가 주역을 맡았다.
정체된 발레계를 흔들어 깨운 것은 니진스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깔사비나가 춤춘 발레 륏스의 공연은 파리 오페라 발레에도 큰 영향을 줘 러시아 출신 예술 감독 이번 클루스틴의 지도 아래 무용수들의 기량이 느리지만 향상되기 시작했다.  또 러시아 출신 무용수 올가 프레오브라젠스카와 마틸다 크세신스카가 초청되기도 했지만 이 시기 관객들은 파리 오페라 발레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1913년 클루스틴이 쇼팽의 음악을 이용해 안무한 Suite de Danses이 대성공을 거두는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이 작품은 1976년까지 330회나 공연된다)
 
파리 오페라는 발레 륏스를 초청했는데 1910년에는 불새와 지젤, 1914년에는 포킨느가 안무한 조셉의 전설이 공연된다.  1914년 Jacques Rouche가 파리 오페라 발레의 예술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발레단은 1916년까지 폐쇄된다.  1917년 Staats가 Stravinsky의 Scherzo Fantastique를 이용해 La reine des abeilles를 안무했고, 1918 Rameau의 오페라 발레 let Castor and Pollux 를 Guerra의 안무로 공연한다.  Leo Staats는 Sylvia를 Albert Aveline과  Carlotta Zambelli를 주연으로 재안무해서 공연하고 Cydalise et le chore-pied 와 La nuit ensorcele (1923), Soir de file (1925)를 창작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세르게이 리에파는 발레 륏스의 수석 무용수 출신으로 1919년 디아길레프가 죽은 뒤 파리 오페라의 감독인 Jacques Rouche의 위촉을 받아 베토벤의 음악을 발레로 안무한다.  본래 발란신에게 맡겨진 일이었지만 발란신이 병으로 안무가 불가능하지 대신 떠맡았지만 성공적으로 일을 마쳐 파리 오페라와 지속적으로 일하는 계기가 된다.
1935년 그는 그의 최고 걸작인 이카루스를 안무했고 1941년에는 Yvette Chauvire를 위해 이스타르를 안무하는데 이 발레의 성공으로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된 Yvette Chauvire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발레리나도 성장한다.  리파르는 랄로의 음악으로 Suite en blanc,  Le Chevalier et la Damoiselle와 Joan de Zarissa 등을 안무한다. 
 
이 시기 발레단은 Yvette Chauvire,  Solange Schwarz, Suzanne Lorcia, Lycette Darsonval이 주도 무용수로 있었고 리파르 역시 자신이 안무한 작품에서 중요 배역을 춤추는 일이 많았다. ,
 
1945년 리파르는 나찌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아 발레단을 떠났다가 1947년에 복귀해 1958년까지 머문다.  1947년 발란신은 세레나데와 아폴로를 다시 안무하고 Palais de Cristal을 파리 오페라를 위해 창작해 발레단의 가장 성공적인 레퍼토리로 포함시킨다.   또 1952년 해롤드 랜더는 갈레오티의 Galeotti's Les Caprices de Cupidon을 재안무하고 Etudes를 고전 스타일로 안무한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는 Cyril Atanassoff (1964), Jean-Pierre Bonnefous (1965), Nanon Thibon (1965), No?la Pontois (1968), Wilfride Piollet (1969), Georges Piletta (1969), Micha? Denard, Jean-Pierre Franchetti같은 안무가들이 짧게 거쳐간 시기였다.
 
1983년 예술감독이 된 누레예프는 개성이 강한 수석 무용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젊고 뛰어난 무용수들을 발굴해 1984년 실비 길렘을 시작으로 1985년엔 이사벨 귈랑, Hilaire 를, 1986년엔 Manuel Legris,  Kader Belarbi 를 1989 년에 수석 무용수로 등용해 새로운 스타 시스템을 열었다.
 
누레예프 시대에는 현대 안무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많이 공연하기 시작했는데 안소니 튜더의 Lilac Garden, Dark Elegies, Leaves are fading, Continuo,  Jose Limon의 The Moor's Pavane, Forsythe의 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 (1987), Neumeier의 Magnificat (1987) 과 Wilson의 새로운 버전인 Le Martyre de Saint-Sebastien (1989) 등이 있다. 누레예프는 고전을 그 나름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많이 올렷는데 1983년 레이몬다를 시작으로 1985년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들을 안무했다.
 
1980년부터 수석 무용수인 패트릭 듀퐁은 1990년부터 예술 감독이 되어 제롬 로빈스와 함께 Glass pieces, In G major, Dances at a gathering, Moves, The Concert 등을 공연하고 롤랑 프티와 새로운 안무의 지젤을,  Odile Duboc, Daniel Larrieu, Angelin Preljocaj , Jean-Claude Gallotta 같은 안무가들과는 현대적인 소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누레예프는 죽기 직전인 1993년 라 바야데어를 파리 오페라를 위해 안무하기도 했다.  현대 발레를 파리 오페라에 받아들이려는 듀퐁의 노력은 계속되어 그는 마츠 애크의 지젤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만들고 롤랑 프티의 Les Forains와 Le Rendez-vous, 마씬느의 Le Tricorne, 발란신의 Theme and Variations, 마사 그라함의 Temptations of the Moon 등도 공연했다.
 
듀퐁은 1990년 Marie-Claude Pietragalla를 시작으로 Fanny Ga?a, Carole Arbo와 Nicolas Le Riche를 1993년 새로운 에트왈로 만든다.  또 솔리스트인 프리미에르 당쉐르로 Lionel Delanoe, Jose Martinez (1992), Agnes Letestu (1993) and Delphine Moussin (1994)가 새롭게 승격됐다.  1995년부터 파리 오페라의 예술감독은 무용수 출신인 Brigitte Lefere가 맡고 있는데 그녀는 1997년 Jose Martinez와 Agnes Letestu를 에트왈로 1996년 12월에 Yann Bridard, Aurelie Dupont, Jean-Guillaume Bart Ghislaine Fallou를 프리미에르 당쉐르롤 승격시켰다.

***** 

2023년에 덧붙임. 

듀퐁과 브리기테 르페브르 이후 뱅자맹 밀피에, 오렐리 듀퐁의 뒤를 이어 현재, 르페브르 때 에뜨왈이 된 호세 마르티네즈가 2022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덧. 

옛날에 국발에서 발주 받아서 거기 홈피에 이런 단체나 작품 소개들 꽤 많이 정리해 줬었는데 개편하면서 다 공중분해됐다.  다른 발레단들 보면 자기들 레퍼토리는 물론이고 의미있는 작품들 정보 아주 세세하게 올리는데 있던 걸 왜 없앴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정리를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다보니 내가 환호하던 언니 오빠들은 돌아가시거나 각국에서 예술감독, 발레 마스터, 안무가로 활동 중. 현재 파레 오페라 발레단 예술감독인 호세 마르티네즈는 한국에도 갈라 발레로 여러번 와서 친숙한 분.  아네스 레테스테랑 부부였던가??? 여하튼 같은 에뜨왈과 부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틀린 기억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