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비행기에서는 밥만 먹고 기절해서 자다가 일어나 밥 먹고 내리는데 이번에는 완벽하게 낮 시간이고 또 안 자고 한국 들어가는 게 시차 적응에 맞을 것 같아서 정말정말정말 오랜만에 거의 안 자고 영화를 내내 보다 왔다.
그 영화들 간단하게 기록.
* 잔 뒤 바리
루이 15세의 마지막 애첩이었던 마담 뒤바리를 다룬 영화. 우리 세대는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보며 성장한 세대로 뒤바리 백작부인은 만화 초반에 마리 앙트와네트를 괴롭힌 희대의 요부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걸 삭 날려줌.
늙은 왕에게 빌붙어 삥뜯으며 호사를 누리는 천한 창녀 출신의 정부가 아니라 루이 15세와 진심으로 사랑하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 현걱한 간격이 초반엔 좀 집중을 못하게 했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쏙 빠져들게 되고 그럴 법도 하겠다 싶어짐.
늙은 호색한인 루이 15세가 왠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웽??? 했는데 조니 뎁. 그 행실과 호불호를 차치하고 보면 연기는 정말 잘 함. 근데 내 젊은 시절에 청춘 스타였던 조니 뎁이 늙은 호색한 역할을 연기하는 걸 보니 세월의 흐름을 정말 느끼게 됨.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우리 연습장 표지에 끼워진 알랭들롱 사진을 보며 가사 선생님이 "참 많이 늙었구나."하며 지나가던 그 중얼거림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여하튼, 루이 15세가 죽은 뒤 수녀원으로 쫓겨난 게 내가 아는 잔 뒤바리의 마지막이었는데 1년 뒤 풀려나 루이 15세가 준 저택에서 잘 살다가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 올랐던 건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안 이야기.
온갖 사치와 호사를 누린 건 고조부인 루이 14세와 조부인 루이 15세인데 정작 그 덤터기를 쓴 건 검소하달 수 있는 루이 16세인 걸 보면 운명이란 게 참. 그리고 베르사유의 장미에선 좀 맹하고 띨빵한 루이 16세가 이 영화에선 아주 매력적인 미청년이라 즐거웠다.
* 랜필드
니콜라스 케이지와 니콜라스 홀트 주인공의 흡혈귀 영화... 인줄 알았는데 뭔가 아리송한 잔혹 코메디 액션물? 개봉했을 때 보려던 영화인데 안 봐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음.
이런 영화를 뇌를 싹 비우고 숨가쁘게 진행되는 액션을 즐겨야 하는데 액션은 좀 역겨울 정도로 잔인하고 스토리의 숭숭 난 구멍이 휙휙 지나갈 정도로 빠르지도 않다. 결말은 웬???
비행기에서 시간 떼우게 해준 걸로 족함.
*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뭐 볼만한 게 없나 휙휙 넘기면서 이미테이션 게임과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루이스 웨인 전시회 가려던(못 갔음. ㅠㅠ) 게 생각나서 선택. 주연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는 외로운 천재의 짧은 사랑과 평생 고양이들을 그린 일생을 빠르면서도 목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스하고 아기자기한 초반부에선 흐뭇한 미소를 띄며 보다가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어두워지는 추락에 찝찝해하면서도 집중.
제발 그만 좀 불행해져라!!!를 외치면서 끝까지 봤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는 정말 루이스 웨인 그 자체였다. 영국 중산층의 생활이며 소소한 삶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덤. 마지막에 스크롤와 함께 이어지는 고양이 그림들은 훌륭한 서비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영화였다.
* 엘리멘탈
개봉 때 트위터에서 한참 회자되던 영화라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끝났는데 비행기에서 발견하고 시작.
영화는 보지 않았으나 수많은 정보를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그 내용을 확인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단, 주인공 앰버와 그 부모님에게 한국인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는 얘기에 동감. 불=매운 것. 코리아 타운이 연상되는 파이어 타운. 그들이 겪어야 했을 인종 차별 등이 영화 안에 은은하게 묻어난다.
초반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매번 폭발하는 앰버에게 이입할 수 없어서 좀 힘들었는데 그 고비를 넘기니 재밌어진다. 물인 웨이드와 불인 앰버가 어떻게 맺어질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이었음.
비행기 내릴 시간이 되어서 후반부는 휙휙 빠른 속도로 넘겨봤는데 언제 시간이 되면 제대로 다시 보고 싶다.
이렇게 4편을 보고 나니 한국. 늘 자다가 왔는데 오랜만에 문화생활도 하는 나름 보람찬 비행시간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