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기도 하고 또 창작물의 초연 구경은 내가 그 안무가를 엄청나게 신뢰하지 않는 이상 별로 선호하지 않는 짓이라 이 공연은 건너뛰려고 했는데 인연이 닿으려는지 ㅇ씨가 공짜표가 있다고 연락이 와서 충동적으로 갔다.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내가 이 공연을 위해 오고갔던 그 기나긴 길보다 춘향이 제대로 된 작품으로 완성될 길이 더 멀겠구나 정도.
나쁘지는 않았다. 단 초연치고는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만약 초연이 아니었다면 난도질을 했겠지만 처음이라는 이유로 많은 미숙함을 용서(?)하려고 한다.
좋았던 점.
한국 전통 문학을 소재로 한국 발레단이 만드는 작품이지만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어설프게 양복 입고 갓 쓴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뭐든 기초나 첫 방향이 중요한데 일단 그 부분에선 제대로 방향키를 잡은 것 같다.
많은 춤을 넣은 점도 좋았다. 초연은 아니었지만 꽤 초반 버전의 심청을 봤을 때 1막 내내 나와 내 일행이 공통적으로 했던 생각은 '제발 춤 좀 춰라!' 였다. 분명 발레인데 1막에 시원스럽게 춤이라고 할 만한 볼거리가 없이 거의 안무 위주의 갑갑한 구성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번엔 최소한 그런 갈증은 없었으니까...
전체적으로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다. 아쉽게도 이 깔끔함에 두 주연은 제외. 너무 잔실수가 많아서 내내 조마조마했음. -_-;
그래도 첫술이 배부를 순 없으니. 첫 공연이라기 보다는 그냥 알파 버전을 봤다고 생각하련다. 앞으로 많이 고치고 또 고쳐야겠지만... 심청처럼 10년 넘게 계속 다듬으면 그 정도의 퀄리티는 갖겠지.
내가 느꼈던 문제점.
중간중간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빛나는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이음새가 너무나 허술. 부분에 집착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연결이나 이음이 너무 거칠고 통일감이 없다. 발레답게 좀 더 세련되고 상징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유치원 학예회 같은 단선적인 진행을 할까 하는 부분이 꽤 있었음. 가장 거슬렸던 건 붓을 뺏어서 어디 감춰버리고 싶었던 2막 이몽룡의 붓춤(? ^^;;;)과 1막 춘향과 이몽룡의 첫날밤. 무대를 꼭 그렇게 변환했어야 하나? 무대와 장면 전환이 정말로 아쉬웠다.
가장 큰 문제는 스토리나 감정선을 자극하는 꼭 필요한 구성이 빠져있다. 춘향이 이몽룡을 얼마나 그리워 하는지,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까지 연결되는 그런 절절한 감정 이입을 줘야 할 라인이 모조리 생략. 한국인에겐 너무나 유명해 모두가 아는 춘향이지만 그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은 도대체 쟤네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불가능할 거다.
반대로 별 필요없는 부분은 지나치게 길고 군더더기가 많다. 이건 춤이 많아 좋았다는 부분과 조금 대치되는 얘기인데... 볼거리를 주려는 노력은 알겠지만 그것도 적절한 선에서 밀고 당겨야지 너무 지나친 볼거리의 연속은 지루함을 불러온다.
프로그램 사진 속 춘향 의상의 색감은 굉장히 근사했는데 무대에 등장한 2막의 춘향 의상의 색깔은 한마디로 으악. 영상물이면 포삽 처리를 해주고 싶었음. =_= 그러나 대체로 의상은 나쁘지 않았다. 무대 장치도.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
무대배경에 한문이 엄청 많이 등장하는데 그게 도대체 어디서 따온 걸까? 그냥 모양새로 갈겨놓은 건지, 아니면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까막눈의 입장에서 궁금했다. ^^;
프롤로그와 중간 내용이 절대 연결이 되지 않는데 이건 추가 개작을 염두에 둔 구성일까?
오늘 공연을 보고 혼자 내린 그냥 결론이랄까... 감상 요약.
21세기에 만난 19세기 발레의 재현. 19세기의 프티파, 20세기의 애쉬튼으로 이어진 클래식 발레 스타일이 이렇게 UBC로 계승이 되는 건지? 전체 구성이나 춤의 분위기상 3막에 결혼식 디베르티스망이 꼭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음악마저도 클래식했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