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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작곡가

차이코프스키

by choco 2005. 8. 29.


예전에 모 사이트에 써준 글. 올리고 나서 중대한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하라고 새 파일을 줬건만 리뉴얼할 때도 오류난 내용이 그대로. ㅠ.ㅠ 포기했다.
내 홈피에라도 올려야지~ 하고 보관했는데 내 홈피 리뉴얼 역시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는 힘들 것 같지만 할 때까지 당분간 여기에 파일 보관차... 과연?????


Thaikovsky, Pyotr Il'ich (1840-1893) 표토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년 5월 7일. 캄스코 보트킨스트생 ? 1893년 11월 6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논쟁거리가 되는 수많은 의문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음악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음악가로서 일반인에게 가장 알려진 의문사의 주인공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다뤄진 모짜르트이다.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라이벌 음악가 살리에르에게 독살 당했다는 푸쉬킨의 드라마틱한 희곡이 유명한 만큼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신빙성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이 사람, 오랫동안 2류 취급을 받던 발레 음악을 한 차원 끌어올린 러시아의 작곡가 표토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놓고 100년 넘게 벌여온 논쟁은 콜레라가 아닌 강요된 자살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콜레라가 아닌 자살로 보는 것일까?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11월 6일 자신의 6번째 교향곡인 비창 초연을 지휘한지 9일 뒤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걸려 급사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콜레라에 걸린 환자는 격리되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일절 금지됐다. 하지만 그의 경우 집에서 병을 앓으면서 친구들과 친지들의 문병을 받았고 가족과 의사, 사제를 포함해 자그마치 16명의 사람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은 아연으로 된 관으로 밀봉해 바로 매장해야 하는데도 차이코프스키의 시신은 당시 관습대로 관에 넣은 채 이틀이나 공개되어 조문객을 맞았다. 이 부분은 동시대 음악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증거들로 차이코프스키 연구가들은 그가 콜레라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글로브 사전의 최신 버전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은 투르모르 공작의 조카나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조카와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면서 스캔들을 막기 위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두 가지 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첫번째 설은 이렇다. 자기 조카와의 열애를 알아챈 투르모프 공작이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사실을 당시 부검찰총장인 야코비에게 보낸다. 차이코프스키와 법률학교 동급생인 야코비는 학교의 명예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그 고발장을 황제에게 제출하지 않고 명예재판을 소집해 차이코프스키를 소환한다. 그리고 10월 31일 명예재판에 소환된 차이코프스키는 친구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다음날 보내온 독약을 마시고 11월 6일 새벽 3시에 사망한다는 것.

두번째 것은 조카와의 동성애설이다.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으며 마지막 교향곡 비창까지 헌정한 조카 보비크와의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자 스캔들을 감당하지 못한 그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치욕을 감추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그의 자살의 원인인지는 현재는 당사자인 차이코프스키 밖에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자살로 밝혀질 경우 교회의 축복 없이 장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 가족들에게 자신들의 의문을 입밖에 낼 수 없는 족쇄 역할을 했고 차이코프스키의 동료들 역시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곡가의 생애와 죽음을 스캔들화 시켜 명예를 실추시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그의 죽음이 스캔들을 막기 위해 강요된 자살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면 이런 논란의 주인공 차이코프스키는 과연 누구일까?

표토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 수많은 교향곡과 오페라들, 그리고 주옥 같은 발레 음악의 창조자. 이런 화려한 찬사 뒤에 인간 차이코프스키는 평생 우울증과 자신의 동성애적 경향과 싸워야 했다.

그는 권위적이고 무뚝뚝한 아버지보다는 프랑스계인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4살 때 어머니를 그리워 하면 만든 '페텔스부르크에 있는 우리 어머니' 라는 노래를 들은 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는 아들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프랑스계인 어머니 때문에 그의 가정은 러시아적이기 보다는 서유럽적이었고 그가 접했던 음악과 문학, 미술 등의 예술도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의 것이었다. 이런 유년기의 영향은 훗날 그의 음악에도 드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5인조와 비교해 서구적인 음악을 만듦으로서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고 그의 음악 인생 내내 러시아적인 것과 유럽의 사조를 반복하며 실험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영향과 함께 그의 모계쪽의 신경쇠약과 우울증이라는 유산도 어머니에게 함께 물려받는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적 경향이 이상형이 될 아버지의 부재로 보고 있다. 일 때문에 자식들과 떨어져 지내는 일이 잦았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따뜻하지도 든든하지도 않은 타인 같은 존재였고 그로 인해 남성으로 성숙되지 못한 차이코프스키의 자아가 그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동성애적 경향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버지의 강요로 법률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학교에 만연하던 동성애에 빠져들게 되고 14살 때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 경향이 심화된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서기관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했지만 남몰래 개인교습을 받으며 음악공부에 열중하던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학교에 들어갔다. 3년 뒤 2등으로 학교를 졸업한 그는 바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강사로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는 졸업작품이었던 칸타타를 수정해 첫번째 교향곡과 두개의 오페라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때 그가 유일하게 여성으로 사랑했던 벨기에 소프라노 아르토트를 만나게 된다. 동성애자이면서도 자신의 성향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그는 처음으로 애정을 느낀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만 아르토트는 그녀 부모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다음해 바리톤 가수와 결혼하고 만다.

이 부분에서 어떤 연구가들은 결혼이 이뤄지지 못한 진정한 이유는 아르토트 부모의 반대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차이코프스키의 망설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그녀와의 관계가 깨진 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5인조인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 보로딘, 무소르그크스키, 큐이와 교류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시기 작곡된 그의 음악들은 그의 특징이었던 세련된 서구적인 것 보다는 러시아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발라키레프를 만나 러시아 5인조와 교류하면서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내적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 때문에 때때로 차이코프스키는 국민주의 음악가의 한 명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현악 4중주 1번' '교향곡 2번' '눈의 아가씨' 등이다.

앞에서도 차이코프스키는 평생동안 서구적인 음악화법과 러시아적인 표현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그의 음악에 다양성을 주었지만 그 개인에게는 큰 갈등과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러시아적인 음악과 서구적인 음악의 교차는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교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그가 가지지 못한 남성성을 추구하는 때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색채를 강하게 띄었고 여성적인 자신의 본능과 어머니를 따를 때는 그의 음악 대부분에 나타나는 경향인 서구적인 색채를 보였다.

그 교차가 가장 심하던 이 시기에 작곡된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차이코프스키 개인의 성적 환상이 가장 잘 표현된 곡으로 분류된다. 어떤 음악학자들은 '이 곡을 클래식 역사상 가장 섹시한 음악'이라고까지 얘기를 하는데 이것은 이 시기 양성애적 성향을 띄었던 차이코프스키의 내적인 심리가 드러난 결과물로 보인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는 이 때 피아노 협주곡 1번과 1875년 마침내 그의 발레 음악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조의 호수'를 작곡했다.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공주와 악마, 왕자에 대한 주제를 누가 내놓았느냐에 대해 여러가지 이설이 있지만 대부분 차이코프스키 본인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는 이 작품을 의뢰받기 4년 전 조카를 위해 비슷한 소재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 아이디어를 수정해 2주만에 2막 - 유명한 테마와 아다지오가 있는- 을 완성하고 다음해 봄에 49곡 전곡을 탈고했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는 차이코프스키 생전에 단 한 개의 발레 작품도 호평을 받지 못하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뛰어난 걸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음악의 진가를 이해하지 못한 안무가와 수준이 떨어지는 무용수들로 인해 초연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고 3년 뒤 있었던 재공연에서는 그야말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최초의 오페라 '지방 장관'이 꽤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자 스스로 스코어를 파기해 버렸을 정도로 비평에 민감한 차이코프스키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상처였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이 때 그는 13년간 그의 후원자이자 제2의 어머니, 그리고 정신적인 연인이 되는 폰 메크 부인과 알게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템페스트'에 반한 그녀는 그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거액의 연금을 매년 지급했다. 덕분에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사임하고 자유롭게 작곡에 전념해 교향곡 4번을 거의 완성하고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스케치에 들어간다.

메크 부인의 정신적, 경제적 후원 아래 모처럼 안정된 정신 상태에서 작곡에 전념하던 그에게 모스크바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냐 이바노브나 밀류코바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결혼해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녀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안토냐를 매몰차게 끊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동정심으로 그녀와 결혼한다. 뒷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결혼 전 안토냐는 미혼인 유명 인사들에게 그런 사랑의 편지를 상습적으로 보냈다고 한다.

동성애자인 그에게 애정도 없는 아내, 세속적이고 허영심 강한 안토냐와의 결혼이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한 차이코프스키는 한달도 안되어 누이동생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몇 달 뒤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안토냐와 별거에 들어가지만 차이코프스키와 동생 모데스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토냐가 완강히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 문제는 끝내 결말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와 완전히 별거한 이후 차이코프스키의 작품활동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해 교향곡 들과 바이올린 협주곡, '에프게니 오네긴' '마녀' '스페이드의 여왕' 등 오페라와 '햄릿' 같은 극음악, 그리고 그의 걸작 발레인 '호두까기 인형'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차례로 작곡한다.

그의 두번째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아카데믹한 발레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백조의 호수의 실패 이후 절대 발레 음악을 작곡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였지만 프티파의 의뢰와 샤를 페로의 동화에 기초한 대본은 그의 영감을 사정없이 자극했고 그는 대단한 열정으로 작곡에 매달렸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청중의 반응은 냉담했고 평론가들은 너무 음악이 난해하고 복잡해 이해하기 어렵고 춤에 적합하지 않다는 혹평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뒤집어보면 이 작품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준다.

춤추기 쉽고 단순하게 만들어진 당시의 발레 음악에 익숙해진 청중과 비평가들에게 차이코프스키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복잡한 구조의 음악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가졌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실패로 상처 입은 차이코프스키는 유럽으로 장기간 외유를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사후 이 작품 역시 발레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차이코프스키는 황실 발레단의 발레 마스터이자 수석 안무가인 프티파에게 그의 마지막 발레가 된 '호도까기 인형'에 대한 작품 의뢰를 받았을 때 리브레토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호프만의 '호두까기 인형과 쥐의 왕 이야기'가 갖고 있는 낭만적인 환상이 프티파의 리브레토에서는 지나치게 생략되어 악상을 얻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는 1,2막의 연결성과 등장인물의 성격을 부여하는데 상당히 고심했다고 한다. 결국 한 시즌을 늦춰 완성하기로 하고 이 작품을 작곡하던 중 미국으로 순회연주 여행을 떠났던 그는 프랑스에서 사랑하는 여동생 사샤의 부음을 받는다.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여행 중에 다시 심한 우울증에 빠지는데 그런 상태에서 미국까지 항해를 하던 중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 왕자와의 여행에 대한 악상을 얻는다.

세상을 떠난 여동생 사샤는 사탕과자 요정, 자신의 안식처였던 사샤의 집은 요정의 나라, 여자조카 타티아나는 클라라, 보비크는 후리츠, 그리고 자신은 드로셀마이어로 대입해 작곡을 시작한다.

그는 사샤를 상징하는 사탕과자 요정을 표현할 악기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파리에서 조그만 피아노 같은 모양의 첼레스타를 발견하고 그 소리에 매료되어 악기를 주문하게 된다. 맑고 통통 튕기는 듯한 음은 그의 의도대로 요정의 움직임을 표현하는데 적절했다.

호두까기 인형 역시 그의 발레 음악에 걸린 저주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초연 이후 수십가지 버전으로 안무 되어 크리스마스의 한 부분으로 사랑 받고 있다. 조곡으로 구성된 것 역시 크리스마스와 상관 없이 연주회장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다.

소위 세계 3대 발레라는 작품 - 지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2개가 당대에 실패한 발레 음악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이란 것. 얼마나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차이코프스키가 발레를 위해 작곡한 음악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특징인 풍부한 색채와 호소력은 훗날 많은 안무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수많은 걸작 발레들의 배경이 된다.

그의 음악을 잘 이용한 대표적인 예로 타계한 뉴욕시티 발레단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을 들 수 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2번, 안단테 칸타빌레, 모짜르티아나,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등 수많은 절대 음악들을 자신의 신고전주의 발레에 이용했다.

발란신은 자신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가지고 발레를 만들 때는 흡사 차이코프스키가 뒤에 서서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는 듯이 느끼는 때가 많았다고 고백했는데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안무가와 무용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주는지 한마디로 표현한다.

이외에도 차이코프스키의 극음악들도 발레에 수없이 사용됐는데 주목할 만한 작품은 휴스턴 발레단의 '눈의 아가씨' 헬프만 안무의 '햄릿' 등을 들 수 있다.

평생을 우울증과 신경쇠약,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방황했던 불행한 인간 차이코프스키. 그의 죽음이 병사인지 자살인지는 지금 누구도 100% 자신을 갖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가슴 두근거리며 호두까기 인형을 기다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공연장에서 만나는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그의 뼈를 깍는 고통의 산물이란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하나하나는 아름답게 승화된, 방황의 저주를 받은, 한 인간의 절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