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너무 많이 떠들어서 뭔가 쓰기 싫은 상태이므로 책에겐 미안하지만 간단히 포스팅. ^^
1. 책 소개글만으로 보면 내가 피해가는 내용이다. 늘 천명하지만 내가 로설을 보는 목적은 오로지 머리를 식히고 행복하기 위해서. 인생 자체가 질척거리고 팍팍한데 책까지 그런걸 보고 싶진 않다. 따라서 로설도 취향에 맞지 않는 과도한 질척거림이나 지나친 흥분은 자제하는 쪽으로 선택을 한다. 그런데 작년에 내가 개인적으로 할렐루야 돌덩이들의 집합소로 보는 그 간윤에서 때렸다고 하기에 꼭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징계 먹을 것 같으면 잽싸게 사려고 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흐지부지될 것 같아 게으름을 피우다 결국 해를 넘겨버렸다.
난 로설 구매는 거의 반드시 대여점에서 1차 검수를 한 다음에 한다. 그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지만 대여점 아줌마가 너무 찝찝해서 초반에 책을 뺐다고 해서 그냥 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전 검수를 했어도 소장했을 것 같다.
2. 초반부엔 좀 지겨웠다. 왜 남주의 어린 시절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길어야 하나. 대충 팍팍 쳐나가도 괜찮지 싶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봤다.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작가는 출판 후에 쏟아질 비난을 대비한 일종의 안전망을 쳤다. 이선미씨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미안하지만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안티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그녀 정도의 입지와 내공을 가진 작가라면 첩첩이 안전망을 치기 보다는 좀 더 강렬하게 정면돌파를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조금 가졌다.
3. 내 취향은 나도 판단이 안 서는 관계로 남의 취향은 더더욱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서평 사이트들과 담을 쌓지만 이건 하도 시끄럽기도 하고 관심을 갖는 책은 좀 찾아가 본다.
대충 호평을 요약하자면 엄청난 몰입을 불러온다. 여주의 운명에 가슴이 저린다. 충격적이다. 광기가 느껴진다 등등. 이건 서평을 보기 전부터 대충 예상한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이선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별로로 보는 그 광란의 귀공자를 놓고도 '先情後愛'라는 사자성어까지 만들어 붙여주는 열혈팬층을 갖춘 그녀라면 이 정도 반응이야 당연한 거지.
악평 역시 예상대로지만... 오히려 나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호객성 내용들이었으니 다 생략하고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로맨스가 아니다' 였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나 그게 사실 가장 궁금했다.
내가 본 결론은 이게 로맨스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로맨스냐. 이건 틀림없이 로맨스다. 다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을 찾아 로맨스란 레스토랑을 찾아오는 다수 고객 입맛에는 양념이 좀 지나치게 세게 됐다고 해야겠지.
남주가 온갖 닭털을 풀풀 날리고 신데렐라 꽃마차를 태워줘야만 완벽한 로맨스일까? 좀 극단적인 설정을 하긴 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끝을 봤던 민해연씨의 커튼콜처럼 이것도 한계를 살짝 밟으면서 하드코어쪽으로 길을 열어줬다. 다음 작가의 문제는 아류가 되느냐 아니면 일단 화전만 해놓은 땅에 제대로 뭔가를 만들어내냐겠지.
사실 그래서 아쉽다. 1권 전반부에 준비한, 남주가 왜 이렇게 악할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변명을 더 줄이고 좀 더 광기와 사랑에 집중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좀 더 풀어내고 싶은 것을 자제했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는다. 솔직히 내게 집중이 흩어지는 순간은 중간중간 안배된 그녀의 변명이 느껴질 때.
아무리 이선미라도 그녀도 사람인데 쏟아질 비난과 돌더미를 맨몸으로 맞기는 좀 그랬겠지. 그나마 그녀니까 이 정도였고 자제를 했지 아마 나나 나와 비슷한 초보들이 이런 류의 환타지를 썼으면 돌더미 피라미드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ㅎㅎ
그래도 스토리 + 글의 힘 + 네임 밸류를 믿고 좀 더 세게 나갔더라면 하는 생각은 두고두고 할 것 같다.
4. 소위 악평으로 분류할 비판 중에서 제호경의 처리에 관한 불만이 많았다. 나도 마음이 들지 않음.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다는 암시를 마지막에 슬쩍 던졌는데... 그냥 두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로설적 해결과 안배는 오히려 이쪽이 더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계속 안배된 제호경을 위한 변명도 좀 길었다는 느낌이랄까... 무조건적인 권선징악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못됐다. -_-;
5. 소위 글발이란 게 이런거구나라는 걸 느낀 부분. 비늘 문신으로 인해 단대오가 어떤 힘을 얻는 것 같은 묘사. 그리고 신이 들린 듯한 문신 퍼레이드. 어지간해서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이냐.' 하기 쉽다. 솔직히 난 처음엔 그 부분에서 좀 뜨아하니 그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유치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 쉽지 않은 일인데 그냥 납득이 가능해졌음. 스토리 안에서 녹아났다기 보다는 문체의 힘인 것 같다.
6. 에필로그의 엔딩. 이런 류의 하드코어를 싫어하는 독자들은 오픈 엔딩을 비극으로 결론지으려고 엄청 노력하는 분위기인데... 글쎄. 내가 볼 때는 해피엔딩이다. 아니란 판단을 했으면 내 책장에 꽂힌 비늘은 당장 장터에 올라갔거나 주변에 기증해버렸다.
앞의 내용들로 볼 때 화끈한 해피엔딩은 솔직히 좀 분위기를 흐렸을 것 같다. 사족 같았던 도입부와 달리 엔딩은 깔끔하게 마음에 들었다. 잘 나가다가 끝마무리에서 확 잡치는 글들이 간혹 있는데 이건 마무리 짓는 힘이 전체의 가치를 올린 느낌.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엄청 길어져 버렸다. -_-;
광란의 귀공자는 제외하고, 이선미 작가의 특기는 강렬한 현대물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 것 같다. 10일간의 계약부터 시작해서 어찌 보면 가장 욕먹을 흔한 소재를 쓰는데도 그게 달리 느껴진다.
그다지 잘 맞는 옷이 아닌 것 같은 시대물이나 코믹보다는 이쪽에 집중함이 독자 -특히 나. ^^-를 위해 감사한 일일듯.
책/픽션
비늘
이선미 / 파란미디어/ 200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