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님에게 얻은 작설차를 오늘 드디어 뜯었다.
차의 맑은 색을 제대로 즐기려면 백자 다기에 우려야하지만 좀전에 완성 직전의 포스팅을 날리고 허탈한데다 만사 귀찮은 관계로 거름망 달린 주전자에 대충 물온도만 맞춰서 부었다.
한 주전자를 다 마셔가는 지금... 다산이 초의선사에게 보낸 것처럼 뭔가 이 차에 대한 감흥을 적어 H님께 보내고 싶다는 뜬금없는 충동을 느끼고 있다.
작설은 홍차처럼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수색이나 맛, 중국차들 특유의 압도적인 향기도 없다.
찻잎을 개봉했을 때도 은은하니 있는듯 마는듯, 차의 색도 향도 튀는 느낌이 전혀 없음에도 모든 맛이 조화를 이루면서 가득 채우는 뭔가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걸리는 것이나 거친 느낌 하나도 없이 매끄러운 맛이 날 수 있는지... 내가 끓여놓고도 지금 감동하고 있다.
내 어휘력이나 미각의 한계로는 표현 불가능이나...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마음과 머릿속 깊은 곳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나처럼 운문과 전혀 인연이 없는 인간조차도 이런 줄글이 아니라 시 같은 감성이 넘치는 글을 끄적여보고 싶다는 충동을 들게 한다.
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도도한 흥취랄까? 참 희한한 경험을 다 하는군. 이전에도 작설차는 꽤 많이 마셨고 가끔 우전을 맛볼 때도 이런 흥취는 없었는데.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고 대충 식힌 물이 오늘 우연찮게 안성맞춤인 온도였던 모양이다.
물과 온도와 양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이런 완벽한 맛 때문에 우리 녹차를 좋아하긴 하는데... 이런 요행을 제외하고 끓이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너무나 맛의 편차가 커서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매력이긴 하지만 대중화에는 역시 문제가 있다.
여하튼 내 손으로 끓여서 이런 맛을 또 잡아내긴 가까운 시일 내에 불가능일듯. 마지막 한방울까지 잘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