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머리 자르러 미용실에 갈 때 시간 떼우기 용으로 잡은 얇은 문고판 책. 200쪽 내외의 얇은 책이라 가벼운 소일거리고 잡았는데 쉽게 읽히는 동시에 내용이 굉장히 알차서 즐거운 독서였다.
히틀러 집권을 전후해서 독일을 떠나 프랑스, 미국으로 떠난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에게 대한 단편적인 정보는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그들의 망명 계기와 성향을 조목조목 정리해놓은 책은 처음이었다.
더불어 독일에 남은 음악가들에 대한 정보과 그들의 활동에 대한 건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에 대한 단편적인 편린을 제외하고 거의 알지 못했던 내게는 거의 획기적인 내용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베베른, 칼 오르프의 행적. 슈트라우스와 얽혀 안익태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고.
가장 비극적인 것은 나치 수용소의 음악가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가혹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사라진 음악가들의 그 수용소 안에서의 음악활동에 관한 부분은 사적인 감정을 제외한 담담한 사실 위주로 기술이 되어 있음에도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이다. 수용소에서 작곡했던 메시앙의 4중주곡이 떠오르고 듣고 싶어지게 했다고나 할까...
한정된 분량 안에서 어쩌면 이렇게 꼼꼼하고 다양한 정보를 난잡하지 않게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해 가장 감탄한 부분은 마지막 챕터인 전후 독일 음악가의 과거 청산 부분이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에 대한 처리와 과거 청산이 잘 되어 있는 곳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음악계를 들춰보면 그게 얼마나 조직적으로 잘 정리된 환상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전후 독일, 특히 서독에 대한 미국의 전후 관리 부분은 지명과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면 해방 이후 한국에 그대로 대입된다. 나치의 스타였던 가장 정점의 인물들은 사형당했지만 그 아래 실무진들은 대부분 면책되어 효과적인 통치 시스템 안으로 흡수됐고 그것은 예술계에도 어김없이 적용이 되어 버렸다.
'가해자는 존경받고 희생자는 살아남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이 시대 독일이었고 존경받는 가해자들의 침묵과 응집으로 과거는 가능한 묻히고 불문에 붙여지다가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된 건 90년대 부터라고 한다. 그건 바로 우리 얘기이기도 한데... 그들은 그나마 90년대부터 이렇게 제대로 된 과거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그나마 시작되던 청산 움직임이 정권이 바뀌면서 또 암흑 속으로 빠져들 조짐을 보이니... 갑갑하다.
얘기가 옆으로 많이 했는데 기대 밖의 정말 좋은 글을 읽었고 이 분야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연구 결과가 책으로 나오면 좋겠다. 학교 다닐 때였다면 이경분 교수의 강의를 신청하던가 청강이라도 했을 것 같다. ^^;
책/인문(국외)
망명 음악, 나치 음악 - 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이경분 | 책세상 | 2008.2.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