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겨울 방학 때 천자문을 10번인가, 20번인가 써가는 숙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절절 매면서 했지만 나중에는 1시간 정도면 천자를 뚝딱 써버릴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지만 그 과정을 통해 머리에 들어간 글자는 정말 단 한자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아마 이왕 하는 거 머리에 넣어보자는 가상한 생각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정해진 분량을 빨리 채워서 벗어나고프기만 했기에 한자 공책만 열심히 낭비했다.
그 이후 수십년이 흘러서 산 책. 천자문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눈곱만큼도 없지만 천자문이 천개의 글자 나열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내용이라는 카피에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그래서 구입을 했는데 모처럼 카피 따로 내용 따로 놀지 않는 알찬 책을 만난 느낌이다.
여덟 글자씩 묶어서 내놓은 건 하나의 문장이고 이야기이다. 그 125가지의 이야기가 저자의 풍부한 중국 경전과 역사에 대한 지식과 어우러져서 참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내가 한자라면 이를 득득 갈면서 죽어라고 싫어하고 지겨워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결코 한자 시간을 좋아하거나 성적이 오르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문을 조금은 달리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한자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고전에 대한 입문이나 공부 차원에서도 추천이다. 굉장히 쉽게 읽히면서도 딱딱 정리가 된다.
그리고 중간중간 예경이며 시경 등 중국 고대 경전들의 글귀를 소개하고 있는데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예언을 한 것처럼 딱딱 들어맞는 내용들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그래서 경전인가 보다. 마치 지금 우리 상황을 빗댄 것 같아 꼭 소개하고 싶은 게 두개 정도 있지만... 지금 견찰과 떡검의 성향이 과거 유신 때와 비교해서 전혀 모자람이 없는 관계로 생략. 지금 저 치들을 보면 2006년에 나온 책이더라도 사찰 대상에 올릴듯.
아마 그러면 시경과 예경이 국방부의 불온 서적으로 분류되는 희대의 코미디가 연출될 수도... 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슬프군.
책/인문(국외)
천자문뎐 - 신화, 역사, 문명으로 보는 125가지 이야기
한정주 | 포럼 | 2008.11.?- 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