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기대없이 잡은 책인데 의외로 괜찮았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미국, 유럽으로 유학 간 행운의 젊은이들. 국비 유학생으로 간 김원극과 여유있는 집안 출신으로 보이는 박승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 노정일과 현상윤은 상당히 고생스런 유학 생활을 한 걸로 보이는데 그 각각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있다.
미국에서 고학과 장학금, 그리고 상대적인 행운 덕분에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노정일의 유학 생활은 당시 미국 사회와 그때도 미국에 많았던 한국 유학생과 이민자들의 모습까지 알 수 있는 일종의 사회학적 기록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힘든 유학은 사실 1970년대까지 심심찮게 보여지는 모습이다.
그의 일본과 미국 유학기는 어려운 조선 고학생의 투쟁사에 가깝다. 졸업을 하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문물이나 주변 문화를 살피는 여유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박승철은 1920년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 유학생. 조선을 떠나 일본의 우편선을 타고 유럽으로 가는 여정부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그는 별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배 여행은 동서양의 이동 경로 파악으로서의 역할도 내게는 해주고 있다.
유럽에 가서는 베를린에 머물지 않고 가능한 많은 곳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북유럽과 남유럽, 동유럽과 영국까지. 짬짬이 시간을 내어 긴 시간 여행하고 그곳에 대한 인상, 그가 방문한 곳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 만난 사람들과 사건, 그리고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집안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는 유학생으로서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 그는 숙박비나 식대, 차비 등 물가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 가는 곳마다 머물렀던 곳의 비용과 경비에 대해 꼼꼼히 기록을 해주고 있어서 이 책은 한 시대를 살피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엄청나다고 평가하고 싶다.
일제 시대 조선인들의 유학지는 일본으로만 한정되어 있고 일본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계를 만났다는 선입견을 완전히 불식시켜주는 책. 이 책에 나온 유학생들이 만나고 들은 조선 유학생들만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운 유학생들이 그 뜻과 지식을 펼칠 조국이 없었고, 또 그들이 그 사실에 너무나 일찍 좌절해버렸다는 것일 게다.
큰 기대는 않고 잡았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던 책.
그러나 알찬 내용에 비해 책의 제본이라고 해야하나? 하드웨어는 엄청나게 부실하다. 딱 한번 봤는데 책이 꺾이고 속지는 접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떨어지고 있다. 내가 책을 험하게 보는 사람이면 내 탓이려니 하는데 맹세컨데 절대 아니다. 개인 소장이 아니라 도서관 같은 곳에서라면 몇번 손을 타면 너덜너덜 난리가 날듯.
여하튼 여기 등장한 네명은 정말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박승철이라는 분은 21세기에 사는 나보다 더 많은 곳을 보고 다닌 게 아닌가. 돈 아까워하지 말고 좀 더 많이 다니고 이렇게 영양가 있는 기록을 남기도록 노력해야겠다.
책/인문(국내)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세상 유학기
김원극, 노정일, 박승철, 현상윤 (지은이), 김진량, 서경석 (엮은이) | 태학사 | 2006.6.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