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감 하나, 수정 하나를 끝내고 뻗었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2시간 동안 서서 기다리고 전시회 다 본 다음에 동생에게 봉사할 겸 쇼핑 따라가서 결국은 나도 왕창 지르고. (ㅠ.ㅠ) 그리고 돌아와서 완전히 뻗어서 골골거리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다. 사실 아직도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내일은 회사가야 하고 다음 주에는 줄줄이 마감이라 지금 안 쓰면 아마 영영 안 쓰지 싶어서 그냥 몇자 끄적.
오늘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회의도 수정도 마감도 없는 날이기도 하고 또 몽유도원도 전시 마지막 날이라 큰 마음 먹고 국립 박물관에 갔다.
몽유도원도 보려고 몇시간씩 줄을 선다는 얘기를 듣고 문이 딱 열리는 시간에 맞춰서 9시에 갔는데 새벽 6시부터 와서 기다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2시간을 기다려서 말로만 듣던 몽유도원도 친견. 좀 찬찬히 제대로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워낙 줄이 길다보니 진행요원들이 계속 잠깐만 보고 빨리 비키라고 종용을 해서 그냥 주르륵 겉핥기로, 내가 몽유도원도 진품을 직접 봤다는데 의미를 두고는 빠졌다는 게 좀 아쉬움.
그래도 그림만 보고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은 덕분에 몽유도원도 그림을 보고 썼다는 조선 초기 유명한 학자나 대신들의 글은 찬찬히 볼 수 있었는데... 서예를 보는 눈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내 눈에도 정말 어쩌면 저렇게 잘 썼을까. 감탄이 나오는 달필들. 특히 김종서의 글씨체는 그가 북방을 개척한 무관이라는 선입견을 제거하고 봐도 참 호방하고 시원시원하니 멋지다. 그외에 신숙주의 글씨도 눈에 착 감겼지만 요 최근 1년간 변절자에 대한 내 감정이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고 살벌한 터라 글씨만 잘 쓰면 뭐하냐! 치사한 X! 이라는 상념만. ^^;
전시회의 포커스가 몽유도원도에 맞춰져 있지만 사실 몽유도원도 말고도 보기 힘든 좋은 문화재들이 그야말로 알짜로 모여있는 전시회다. 몽유도원도 외에 수월관음도나 천마도, 달마도 같이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림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특히 내 취향이었던 것은 화조구자도. 어쩌면 그렇게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잘 잡아서 그리셨는지. 이암 선생의 팬이 되기로 했다. 이응로 선생이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시를 현대적인 추상 서예료 구상한 작품도 마음에 들었다. 그건 팬시화를 시켜도 괜찮을 것 같은데 기념품 가게에는 없었음.
솔직히 난 그림보다는 도자기, 공예품 쪽이 더 관심이 많은 관계로 그쪽으로 눈요기를 아주 흡족하게 했다. 예전에 도자기 다큐할 때 영상과 사진으로 봤던 포도매작문 백자를 직접 만나본 것은 감동이었고 고려의 은제도금 주전자와 수반은 비슷한 복제품이라도 있으면 하나 업어오고 싶었다. 저기에 홍차를 끓여 마시면 맛도 좋고 분위기도 진짜 환상일텐데 하는 큰일날 생각을 보는 내내 했음. ㅎㅎ;
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을 볼 때마다 그 발굴과정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니까 참으로 찝찝... 백제의 금제 머리 장식은 과연 머리에 어떤 모양으로 저걸 사용했을까 볼 때마다 궁금하다.
몽유도원도 원본을 꼭 봐야한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으니 이제 불가능이다) 그렇게 복작거리지도 않고 알짜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아주 훌륭한 기획이었다. 넓은 박물관을 여기저기 헤매지 않도록 요점정리를 해놨다고 하면 될 듯. 시간을 내어서 한번쯤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전시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