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홈페이지를 엎어버린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했던 컨텐츠이다.
내가 홈피를 처음 열었던 당시에는 발레 관련이나 스트라빈스키에 관한 정보를 국내 웹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정보에 목말랐기 때문에 열심히 자료를 찾아나디고 책도 사고 해서 번역을 해서 다 함께 보자고 올려놨더니 나쁜 쪽으로만 머리 빨리 돌아가는 대학생이란 것들이 그걸 고대로 베껴가서 레포트 내고는(<-여기까진 100% 이해 가능. 본래 그러자고 홈페이지 열은 거니까. 따져보면 저 내용도 외국 사이트 내용을 몇개 이어서 번역한 거다.) 레포트 사이트에 팔기까지 하네. -_-+++
몇번 찾아내서 내리게 하고 하다가 이걸 올린 애랑은 정말 대판 했었음. 한국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 미국에서도 절판된 책을 참고 도서랍시고 (저 아래에 스트라빈스키 저서 목록을 그대로) 올려놓고 자기가 썼다고 박박박. 결국 레포트 팔아서 번 돈을 다 토해내긴 했지만 (판매 수수료 토해내지 않으려고 버티던 그 레포트 사이트에서도 다 받아냈음. --V) 그거 잡으러 다니기도 귀찮아서 홈피를 엎어버렸었다.
그런데... 몇년 뒤에 더한 것들을 잡아 넣으러 경찰서까지 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음. 에효호호호호...
이고르 표도르비치 스트라빈스키(1882~1971)
1882년 6월17일 러시아 페텔스부르크 근교 오라니엔바움 출생
1971년 4월6일 뉴욕에서 사망
위인전이나 신문과 같이 활자화된 매체에서 누군가의 얘기를 할 때, 우리는 대부분 그의 업적과 뛰어남,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고함을 찬양하는 글귀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러고 싶지가 않다.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이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법 하지 않은 고결하고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높은 가장 가격으로 파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자신의 명성과 재능을 잘 이용해 대중과 애호가를 사로 잡을 줄 아는 동시에 사소한 비평에도 움추러 드는 소심함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민속적인 테마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는, 표절이라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어내는데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고 저작권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수없이 편곡하고 개작해냈다.
누구보다도 세속적이고 잇속을 챙기는데 뛰어났던 동시대의 흥행사 디아길레프 조차도 그에게 “자네만큼 돈을 잘 챙기는 놈은 처음 봤다” 고 했을 정도.
하지만 이 모든 인간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그 관용적이고 고식적인 찬양의 단어들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천재는 항상 불우하고 가난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찬사를 받는다는 전설을 날려버린 이 사람.
이고르 표도르비치 스트라빈스키.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 음악에 가장 폭넓고 다양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20세기가 저물던 시기에 유행처럼 지난 천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을 끼친 것들에 대한 조사에서 그의 초기 작품 ‘봄의 제전’은 거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음악사에서 또 문화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작곡을 시작하지 않고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소재를 찾아 헤매면서 거기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뽑아냈고 또 날카롭고 예민한 청각과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연습을 통한 완성을 선호하지 않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은 순전히 개인적인 자기 실험을 통해 발전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고 그의 그런 경향은 음악적으로 재미있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독특한 악기 구성과 사운드, 한눈에 특이함을 느끼게 되는 특징적인, 그리고 천재적인 오케스트레이션. 이미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라 있던 거쉰 조차도 스트라빈스키에게 오케스트레이션 개인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가기까지 했다. (거쉰의 연수입을 들은 스트라빈스키는 왜 자기에게 와서 개인수업을 받는지 모르겠다는, 역시나 그 다운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명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130여곡의 음악을 그는 우리에게 남겼다. 메시앙이 카멜레온 같은 작곡가라고 평가했던 스트라빈스키. 이 모든 것은 그의 독특한 음악 일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시절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 표도르 이그나토예비치 스트라빈스키는 키에프와 세인트 페텔스부르크에서 오페라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베이스 가수였다. 이고르는 4명의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심취한다. 그는 집에서 아버지가 출연할 오페라 작품을 연습하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했고 마린스키 극장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와 발레 공연에 친숙해졌다.
9살 때 처음 피아노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곧이어 화성과 대위법 수업도 듣기 시작했다.
최초의 선생은 스네트코프라는 여선생이지만, 그에게 제대로 된 피아노 교육을 시킨 사람은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인 카쉬페로바(Kaschperowa)부인이었다. 이 카쉬페로바부인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알고 그의 재능을 아꼈고 피아니스트로서 그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교수법 중에서 페달을 사용하지 않는 연주 기법은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 음악의 특징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모든 피아노 곡의 악보를 보면 어느 곳에도 페달의 사용이 표시되지 않고 있으며, 페달이 사용되지 않은 상태의 피아노 음색을 통하여 그는 자신만의 새롭고 독특한 음악어법을 창출해 내게 된다. 스트라빈스키는 그 외에도 아키멘코에게 화성학을, 칼라파티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의 피아노 학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악보 보는 법을 매우 빠르게 배웠고 곧 즉흥연주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때 주로 즉흥연주를 하였고, 이것은 오랫동안 나의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즉흥연주는 내 피아노 연주의 테크닉을 향상시켜 주었고, 나의 음악적인 사상을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작곡하는 과정에서 단지 상상 속의 소리만으로 작업하기보다는 직접 소리 나는 악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피아노 교육은 나중에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피아니스트로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가 음악으로 경력을 쌓는 것을 반대해 세인트 페텔스부르크 대학에서 범죄학과 논리철학을 배우도록 보냈고 그는 1905년 부모의 소망대로 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그의 음악적인 관심은 작곡으로 옮겨가는데 1902년, 그의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학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아들과 알게 되어 러시아 5인조의 한사람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만나게 된다. 이고르의 음악적 시도와 재능에 매료된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에게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지 말고 독자적으로 공부를 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계속 스트라빈스키에게 음악적 조언을 계속하다가 다음해부터 기악편곡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전에 특별히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스트라빈스키로서는 작곡기법을 정확하고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기간이었고 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예술관을 심어준 스승이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란 배워서 얻던가 또는 스스로 발견한 특별한 방법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들은 우리가 행하는 작업의 정당성을 입증하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이것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서 전수된 그의 예술관이기도 했다.
이들의 교류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1903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지도 아래 피아노 소나타를 처음 작곡하게 된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에 대한 구상을 얘기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중 몇가지를 편곡했는데 마장조 교향곡도 포함된다(1905~1907) 이고르의 작품은 세인트 페텔스부르크에서 대중앞에서나 소수 애호가들 앞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마장조 교향곡과 메조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목신과 양치기’가 페테르스부르크 궁정관현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러시아에서 이런 소수의 애호가들을 위한 작품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1908년 림스키-코르사코프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소규모 교향시 ‘불꽃놀이’로 이 작품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사망하기 직전에 연주된다. 그가 죽은 뒤 스트라빈스키는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을 위한 애도가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다음해 페텔스부르그에서 연주되지만 악보가 소실된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이외에 그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작곡가는 무소르그스키와 차이코프스키였고 (실제로 스트라빈스키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주제로 몇 개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그의 초기 음악에는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의 영향이 보이지만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드뷔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1905년 대학을 졸업한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큰 사촌인 키테리나(캐더린) 노센코와 결혼하는데 신혼 때 부모와 함께 살긴 했지만 여름을 우크라이나의 볼리냐에 위치한 우스틸룽에서 보냈고 이곳에서 1907년 장남 테오도르, 1908년 장녀 류드밀라가 태어난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륏스 시기
1907년과 1908년에 거쳐 완성된 그의 초기 관현악곡인 스케르쪼 환타스티크(Scherzo Fantastique)와 불꽃놀이가 성 페테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이 연주회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이 직접 연주한 4개의 피아노 연습곡과 함께 연주되면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스트라빈스키는 본격적으로 데뷔한다. 1909년 2월6일 페텔스부르그에서 초연되었을 때 이 공연을 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해 파리에서의 여름 시즌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스트라빈스키를 발레단의 작곡가로 초청할 것을 약속한다. 발레 륏스에 합류한 스트라빈스키는 다양한 발레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하거나 작곡하기 시작하는데 발레 륏스와 그의 첫 공동작업은 쇼핑의 ‘레 실피드’를 위한 피아노 음악의 오케스트라 편곡이었다.
발레 륏스의 시즌이 대성공이긴 했지만 러시아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요구하는 파리의 반응에 1910년 시즌을 위해 디아길레프는 새로운 발레를 만들 것을 결심하고 불새를 선택하지만 디아길레프가 초기에 음악을 맡긴 작곡가들이 그의 수준에 만족한 작품을 뽑아내지 못하자 그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이 발레의 작곡을 맡긴다.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불새는 1910년 6월25일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자마자 대성공을 거두면서 스트라빈스키의 입지를 확실히 굳히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는 이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concert piece라는 작품을 구상하고 작곡에 들어가 있었다. 이 작품의 스케치를 들은 디아길레프는 발레를 위한 곡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고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간의 고성이 오가는 논쟁 끝에 결국 그가 굴복해 그는 페트루슈카라는 발레 시나리오에 이 작품을 맞춰 작곡한다. 그리고 1911년 파리에서 공연된 페트루슈카 역시 스트라빈스키에게 또 하나의 성공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 찬사는 작품이 연주되고 무대에 오른 다음에야 쏟아지는 것이었고 연습이 끝나기 전까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들이 모여 있다는 비엔나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연주가 거부될 정도였다. 악보를 받은 연주자들이 극장 구석에 있는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발을 구르고 활로 보면대를 칠 때 그는 스카프로 얼굴을 둘둘 말고 신경질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지를 질타하는 디아길레프의 연설이 끝난 다음 연습이 시작됐고 연주가 끝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 몽퇴와 스트라빈스키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 순간에야 스트라빈스키는 스카프를 어깨에 걸치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런 소동은 다음 해에 공연되는 작품 봄의 제전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당시 음악적 경향은 몽롱한 인상주의에서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음향을 최대한 이용하는 쪽으로 유행이 변하고 있었는데 이런 조류 속에서 페트루슈카의 불협화음은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페트루슈카가 공연되기도 전, 작품이 완성된 직후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위대한 희생이라고 불리는 원시적인 봄의 대교향악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디아길레프는 또다시 스트라빈스키를 설득해 이 작품 역시 발레로 만들 것을 요구했고 이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봄의 제전’이다. 이 작품은 1911년부터 13년까지에 걸쳐 작곡됐는데 다이나믹하고 원시적인 음악에 맞춰 1913년 5월2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 되고 봄의 제전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그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작곡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 되었다
다작인 그는 이런 발레 음악을 작곡하는 와중에도 1908년부터 9년에 걸쳐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 이야기를 주제로 짧은 오페라를 작곡을 했다.
이 오페라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자유극장의 위촉으로 만들어졌는데 불새 때문에 많은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이 작품은 약속한 날짜에 완성됐다. 하지만 극장의 사정으로 공연에 문제가 생기자 디아길레프가 여기에 다시 잽싸게 개입해서 1914년 발레 륏스 시즌을 위한 발레 작품으로 개작을 하도록 해서 공연한다.
이 해 여름에 그는 발레를 위한 칸타타 ‘결혼’의 작곡에 들어가는데 이 작품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민족적인 주제와 풍습을 차용하기로 결심한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 공연되지 못했던 이 작품은 1915년과 16년 발레 륏스에 의해 공연 준비를 마쳤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작곡을 꾸물거리는 바람에 1917년에야 완성됐고 그가 인정한 완벽한 마지막 버전은 1923년에야 완성된다.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의 유대관계는 1910년부터 14년까지 가장 끈끈했고 이 시기에 그는 러시아적 요소를 음악에 녹여 유럽에 소개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발레 륏스의 시즌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그들과 함께 파리, 로마, 베를린, 비엔나, 부다페스트와 런던 같은 유럽 도시를 여행하면서 유럽의 음악적 경향도 빠르게 흡수하면서 나머지 기간은 러시아 우스틸룽에 있는 집에서 보냈는데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에 몰두했고 페텔스부르그에는 가끔 방문하는 수준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 1910년 그는 기후가 좋은 스위스로 이주하는데 그해 로잔느에서 둘째 아들 소울리마를 얻고 1914년 레진에서 둘째딸 밀레나가 태어난다. 그리고 봄의 제전과 나이팅게일의 상당 부분은 스위스의 클라렌스에서 작곡되는데 특히 전쟁 기간에 초기에는 클라렌스에서 나중에는 모르게스에서 그의 작품 활동이 이뤄진다.
스위스 망명 시기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와 발레 륏스와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생활 때문에 스위스 곳곳을 전전하며 보내던 그는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작품들은 제네바에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맡았는데 이때 그는 스위스의 소설가 샤를 프레드릭 라무즈와 교류를 하게 되고 그의 권유로 병사의 이야기를 작곡하게 된다. 이 작품은 대사와 동작, 춤이 함께 있는 음악으로 소규모 극장을 위한 공연용 작품이었다. 병사의 이야기는 로잔느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지만 갑자기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면서 막을 내려야 했다. 이 스위스 시절 작곡한 작품 중에 병사의 이야기 말고도 기억할 만한 작품으로는 무대공연을 위해 연주되고 불려지는 부를레스크풍의 이야기 ‘여우’가 있다.
프랑스 거주 시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전재산을 잃었고 1962년이 될 때까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프랑스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1920년부터 39년까지 거의 20년을 Biarritz, Nice, Voreppe와 파리 등지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음악적 영감은 유럽적인 코스모폴리타니즘 스타일로 변해가게 된다.
이 시기에 그의 음악에는 초기에 강하던 러시아적인 색채가 사라지고 신고전주의적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는 고전과 바로크스타일의 정신을 부흥시키려는 음악풍조가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 시기의 풍조에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음악의 근본적인 전환은 수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것에 대해 “수집, 실험, 합병”으로 설명했다. 이런 경향으로 작곡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이 1927년 작곡된 오이디푸스 왕과 1930년의 시편 교향곡으로 이 두 작품은 초기의 경향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뛰어난 걸작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서 그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륏스와 다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들의 관계는 초기와 달리 유대감이 덜하긴 했지만 디아길레프가 죽고 발레 륏스가 해체될 때까지 지속된다. 1920년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작곡된 풀치넬라는 페르골레지의 곡을 기초로 스트라빈스키가 편곡한 것으로 이 작업은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적 경향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28년의 아폴로와 뮤즈는 발레 륏스를 위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마지막 신작으로 다음해 디아길레프가 죽으면서 발레단은 해체된다.
발레 륏스로부터 지속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자 스트라빈스키는 부업으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 그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많이 작곡했고 많은 신작들은 -Concerto for Piano and Wind Instruments (1923-24), Sonata for piano (1924), Serenade in A Major for piano (1925), Capriccio for piano and orchestra (1929), and Concerto for Two Solo Pianos (1935)- 그 자신이 작곡하고 연주하면서 초연 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동안 그는 1925,35,37년에 북아메리카를 방문했고 1936년에는 남아메리카에서도 공연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들은 디아길레프 사후에도 사장되지 않고 1920년대 다른 발레단에서도 사용됐고 또 발레 륏스 초기의 스타였던 이다 루빈시타인은 자신의 발레단을 위해 스트라빈스키에게 작품 의뢰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1928년 작곡된 요정의 키스와 1934년 작품이 페르세포네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이 작품들은 그의 위대한 선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와 성악 음악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 부분은 20세기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멜로드라마를 이용해 노래, 대사, 춤과 마임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1937년에는 아메리칸 발레를 위해 카드 파티를 작곡한다.
1934년에 프랑스에 귀화한 그는 예술 아카데미 회원 자리를 지원(1936)했지만 플로랑 슈미트에게 빼앗겼고 또 1938년부터 39년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1938년 장녀를 폐결핵으로 잃고 다음해인 1939년 아내가 3월에 모친이 6월에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미국 거주 시기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꾸리기 위해 하버드 대학의 찰스 엘리옷 노턴의 초청을 받아들어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1940년 오랫동안 친구였던 베라 드 보셋이란 예술가와 결혼한다. (사실 그들은 1921년부터 연인 사이였다) 하버드에서 음악 시학을 강의하던 시기에 그는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다가 할리우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이주해 4반세기 이상을 그곳에서 거주한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스트라빈스키는 2차 세계 대전동안 다장조 교향곡(1938-40), 세악장 교향곡(1942-45)라는 두개의 걸작 교향곡을 완성한다. 1920년에 작곡한 목관 악기를 위한 교향곡에 나타났던 러시아 음악을 활용한 전통 음악을 다루는 기법과 음악적 요소의 맥을 잇는 다장조 교향곡은 교향곡 형식의 신고전주의적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악장 교향곡은 협주곡과 교향곡 요소의 성공적인 결합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1945년 미국 국적을 얻은 그는 1948년부터 51년까지 그는 신고전주의적 장막 오페라인 ‘Rake's Progress’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의 대본은 미국의 시인 오든과 작가 체스터 칼만이 맡았다. 이 작품이 완성됐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으로 돌아가 베니스의 Teatro la Fenice에서 작품의 초연을 직접 지휘한다.
그가 이 작품을 작곡하는 동안 그는 미국의 젊은 음악가인 로버트 크라프트를 할리우드의 자택으로 초청해 몇몇 부분에서 도움을 받는데 이 방문은 그들 모두에게, 특히 스트라빈스키에게 두고두고 이익이 되는 만남이었다. 이후 크라프트는 스트라빈스키의 친구이자, 조력자, 상담자로 가족 같은 존재가 된다.
12음 기법의 찬미자인 크라프트의 조력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The Rake's Progress를 마지막으로 그의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마감된다. 스트라빈스키는 크라프트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베베른에 대해 알게되고 그의 작품 연구에 심취하면서 쇤베르그와 베르그의 작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 비엔나 제3악파 작곡가들의 무조주의적 영향은 이 시기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 현저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1955년 작곡된 Canticum Sacrum와 1953년부터 57년까지 작곡된 발레 아공은 그 영향이 대규모로 발전한 형태의 작품으로 음계와 음조의 시작은 완벽하게 12음조적 진행을 나타나고 복귀부 역시 도입부와 같은 진행으로 마무리된다. 이 경향은 더욱 발전해 1958년 작곡한 Threni, 1959년의 Movements , Variations (1964), Requiem Canticles (1966)까지 그의 걸작들이 계속 탄생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과거의 것에 비해 한층 더 짧아지고 12음조의 영향이 발전되는 동시에 종교적인 색채가 나타나면서 그의 음악에 위대성을 더해준다.
1962년 그는 미소 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수십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는데 그의 방문은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환영 받지만 당시 소련 음악계에서 그의 12음과 종교적 색채의 음악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Requiem Canticles 이후 나빠진 건강 때문에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활동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 때 스트라빈스키는 주로 자신의 작품들을 지휘하거나 녹음작업을 하며 보냈지만 병중에도 작곡을 멈추지 않고 1970년에는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이용한 기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971년 4월6일 뉴욕에서 죽지만 유언에 따라 4월 15일에 그가 칸티쿰 사크룸을 헌정했던 베니스 생 미쉘 섬의 공동묘지에 묻힌다.
음악적 성향
그는 전 생애를 통해 110곡의 작품과 15곡의 편곡을 남기고 있는데(정확하진 않음) 그의 작품은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1기. 습작시기(1902-1909)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우던 시기.
불꽃놀이, 스케르쪼 환타스티크, 마장조 교향곡 등
2기 발레 륏스 시기 (1909-1919)
러시아 민화, 민요, 대편성의 관현악, 복조, 복잡한 리듬을 사용했던 시기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결혼 등
3기 신고전주의 시기(1920-1952)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적 사고, 재즈의 어법등에 의해서 새로운 색채가 가미된 시기.
풀치넬라, 오이디푸스왕, 시편교향곡 등
4기 12음 기법 시기 =음열주의 시기 (1953-1961)
쇤베르그의 영향을 받은 엄격한 12음 사용 시기
스트라빈스키는 비엔나 제3악파의 무조와 음열주의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의 사용은 쇤베르그와 다른 선열이 존재하는 형태.
칸타타, 아곤, 트레니 등으로 갈수록 엄격한 12음 작법을 구사하였다.
5기 종교음악 시기 (1961-1970)
러시아와 라틴의 종교음악을 활용한 선법과 제재를 사용한 음악 작곡 시기
12음과 종교 음악 작품들은 이전의 경향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결성을 갖고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선법을 사용했던 중세 음악까지 탐구했던 그의 신고전주의 말기의 음악과도 연결되어 있다.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 레퀴엠 칸티클스
저서
- 내 생애의 연대기:Chronicle of My Life(1935)
- 하버드대학에서의 강연 정리 음악의 시학:Poetics of Music
- 스트라빈스키와의 대화 (로버트 크래프트 공저)
- 회상과 주석(=회고와 결론. 로버트 크래프트 공저)
- 제시와 전개 (=테마와 에피소드. 로버트 크래프트 공저)
- 대화의 일기 (로버트 크래프트 공저)
연대표
A timeline of Stravinsky's life
Age Year Notes
1882 - Born in
1883 -
1884 - A brother, Gury, is born.
1885 -
1886 -
1887 -
1888 -
1889 -
1890 -
1891 - First piano lessons. Meets his cousin Catherine Nossenko
who later becomes his wife.
1892 -
1893 - Glimpses Tchaikovsky at the Mariinsky Theater.
1894 -
1895 -
1896 -
1897 - His brother Roman dies.
1898 - Tarantella. (first composition extant)
1899 -
1900 -
1901 - Begins law studies in
1902 - In
to be his teacher. Later tha year, his father dies.
1903 -
1904 - Sonata in F# minor (composed under Rimsky's tutelage).
1905 - Graduates from
Engagement to Catherine Nossenko. Demonstrators are fired
upon in St. Petersberg.
1906 - Marries his cousin, Catherine Nossenko.
1907 - His son Theodore is born. Has two movements of his Symphony
in Eb performed in
1908 - The Symphony in Eb and The Faun and the Shepherdess are
completed and premiered. Rimsky Korsakov dies.
1909 - Fireworks and Scherzo fantastique. Diaghelev is impressed by
S.'s music and commissions some arrangements and, later, The
Firebird.
1910 - Firebird is premiered. Begins sketches of Rite. His son
Soulima is born.
1911 - Zvezdoliki. Begins composition of The Rite of Spring.
1912 -
1913 - The Rite is premiered, accompanied by a riot. Returns
to composing The Nightengale (begun in 1909).
1914 - World War I begins. Schedule of Ballets Russe is interrupted.
Begins composition of Les Noces (not to be completed until
1923).
1915 - Debuts as a conductor with his Firebird suite in
1916 - Renard. Visits
1917 - Bolshevik Revolution.
1918 - The Soldier's Tale.
1919 - Piano-Rag-Music. Begins Pulcinella.
1920 - Pulcinella. Stravinskys leave
Symphonies of Wind Instruments.
1921 - Begins affair with Vera Sudeikin, later to become his 2nd
wife. Struggles with instrumentation of Les Noces.
1922 - Mavra.
1923 - Les Noces. Octet. First recording (of Octet).
1924 - Begins concertizing as pianist. Concerto for Piano and
Wind Instruments. [2nd] Sonata.
1925 - Serenade in A. First American visit.
1926 - Begins Oedipus Rex. Experiences a major religious conversion
in
1927 - Oedipus Rex. Begins Apollo.
1928 - Apollo Musagetes, The Fairy's Kiss.
1929 - Diaghelev dies, Ballet Russe disbands. Capriccio.
1930 - Symphony of Psalms.
1931 - Violin concerto.
1932 - Duo Concertante.
1933 - Begins Persephone.
1934 - Becomes a French citizen. Persephone.
1935 - Second American tour. Concerto for two pianos. Begins
Jeu des Cartes.
1936 - Tour of
1937 - First sketches of symphony in C.
1938 - Oldest daughter Lyudmilla dies of TB.
1939 - Wife and mother die. Gives Norton lectures on the poetics of
music.
1940 - Stravinsky leaves
in C. Tango (an attempt to write a popular piece).
1941 -
1942 - Danses concertantes. Begins symphony in 3 mvmts.
1943 - Ode. Begins Sonata for two pianos.
1944 - Sonata for two pianos. Scherzo a la Russe. Scenes de
Ballet. Elegy for solo viola.
1945 - Ebony concerto. Symphony in 3 mvmts. Becomes a
1946 - Concerto in D. Begins Orpheus.
1947 - Orpheus. Visit from Auden to discuss the Rake.
1948 - Begins work on The Rake's Progress. First meeting between
Robert Craft and Stravinsky. Robert Craft comes to live
with the Stravinskys.
1949 -
1950 -
1951 - The Rake's Progress. Schoenberg dies. Begins Cantata.
Visits
1952 - Concertino for 12 instruments. Cantata. Hears Craft rehearse
Schoenberg's Serenade.
1953 - Septet. Shakespeare Songs. Begins sketching Agon.
1954 - In memoriam Dylan Thomas. Begins composing Agon.
1955 - Canticum Sacrum.
1956 - Vom Himmel Hoch. Suffers a stroke.
1957 - Agon. Hears Boulez. Begins Threni.
1958 - Threni.
1959 - Movements for Piano and Orchestra.
1960 - Monumentum pro Gesualdo.
1961 - A Sermon, a Narrative and a Prayer.
1962 - The Flood. Begins sketching Abraham and Isaac.
1963 - Abraham and Isaac.
1964 - Orchestral Variations.
1965 - Itroitus.
1966 - Requiem canticles.
1967 - Last recording (Firebird suite).
1968 - Arranges Wolf songs.
1969 - Moves to
1970 - Summers in Evian.
1971 - Dies in
buried on the cemetery
nine days l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