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라 쎄종에서 점심 모임을 하려고 했는데... 이 추운 연말 주말 압구정동 길이 얼마나 막힐까 상상하자 그냥 곧바로 포기가 되고 다음 장소를 물색하다 떠오른 곳이 가까운 이태원의 이스트 빌리지. 내내 한번 가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꼬이고 얽힌 곳인데 덕분에 오늘 겨우 갔다. (사실 오늘도 아침 6시 반까지 마감하고 뻗을 때는 취소하고픈 마음이 굴뚝이긴 했었음.)
사진은 동생이 열심히 찍었지만 그거 받아서 올리고 어쩌고 하려면 아마도 포스팅 자체를 안 하지 싶어서 그냥 말로만 풀기로 했음.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고 이 셰프가 한식을 갖고 상당히 재미있고 괜찮은(<-이게 중요) 변형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어설픈 퓨전이라 옛날 옛적에 청담동에 '시안'이 퓨전 레스토랑의 원조로 한참 뜰 때도 내 돈 내고는 먹지 않았지만 이스트 빌리지에 대한 묘사를 들으면 시안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괜찮았음.
우선 재료의 질이 정말 좋다. 매일매일 수산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해산물은 그날그날 메뉴가 바뀐다고 하던데 재료들의 신선도와 퀄리티를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 손을 많이 대지는 않은 듯 하면서 고유의 맛과 향을 살리는 건 재료의 질이 높고 신선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이다. 내가 요리를 할 때도 재료가 싱싱한 거면 정말 최소한으로 조리하면 신선도나 질이 떨어지면 그걸 감추기 위해서 이런저런 양념과 갖은 조리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얘는 장난이 없는 정직한 맛.
비빔밥, 매운탕, 만두 등 단품들도 있지만 이것저것 골고루 먹을 수 있는 4만원짜리 +10% 세금 코스를 시켰다. 평일 점심 때는 2~3만원대 코스도 있지만 오늘은 주말이니...
처음 나온 건 육회와 어린 배춧잎인지 엔다이브인지와 고수. 육회가 시각적으로 주는 비주얼부터 싫어서 평생 한번도 육회를 먹지 않았고 친구 ㅅ양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얘네는 꼭 배추 속 무쳐 놓은 것처럼 해놔서 둘 다 육회인 걸 모르고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살짝 매콤달달짭짤한게 의외로 괜찮네? 그때부터 다 먹었음.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배추와 육회만 먹어도 괜찮겠지만 난 고수가 있는 게 훨씬 더 임팩트 있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동안 왜 사람들이 육회를 먹나 했는데 이번에 먹어보니 왜 먹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육회라는 걸 알았다면 아마 배추와 고수만 먹었을 것 같다. ㅎㅎ;
두번째로 나온 건 한국식 해산물 플래터. 이날은 뽈락 구이 한마리와 금방 데쳐낸 골뱅이와 참꼬막. 꼬막과 골뱅이가 맛있게 살짝 데쳐내기가 의외로 쉽지 않은데 역시 프로는 달랐음.
따끈따끈한 플래터를 맛있게 먹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소복한 야채들 위에 스테이크가 얹힌 샐러드가 나온다. 위에 끼얹어주는 간장 드레싱이 깔끔했다. 채소들도 양상추만 있는 게 아니라 비타민 등등 이 계절에 몸값 좀 하시는 애들이 많아서 흡족~ 원가율을 아주 높게 잡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육즙이 뚝뚝 흐르는 아주아주 맛있는 해물전. 이건 정말 프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전굽기다. 두툼한 걸 잘 익히면서도 그 익힘이 지나치지 않고 촉촉한 걸 보면서 감탄~ 여기에도 고수가 곁들여지는데 고수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좀 괴로울 수도 있을듯.
이미 배가 차고 있는 와중에 채끝 스테이크가 나왔다. 굽기 정도는 어쩔까 할까 하다가 미디움 레어로 했는데 딱 맞았음. 그릴과 프라이팬에 구워내는 과정을 제대로 거쳤는지 역시나 육즘이 잘 지켜진 맛. 사이드로 매시드 포테이토를 둘러주고 소스와 씨겨자를 조금 주는데 고기를 구울 때 겉에 뿌린 소금이 아주 맛있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먹는다면 소스는 생략하고 그냥 먹을 것 같다. 소금을 아주 좋은 걸 쓰는 것 같다. 고기 자체는 앞서 다른 재료들에 비해서는 살짝 퀄리티가 떨어지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거야 상대 평가이고 절대 평가로 볼 때는 괜찮았음.
이제는 끝났구나~ 하고 갈 준비를 하는데 이번엔 백김치와 쑥갓을 곁들인 매운 해물 잡채가 나온다. 술이 마구마구 땡기는 요리다. 새우, 오징어 등등이 예쁘게 들어간 잡채를 먹으면서 술 마시고 싶어~를 중얼중얼했지만 그게 마지막 요리라서 자제했음. 같이 간 동생은 사실 스테이크 샐러드 때부터 와인을 한잔 시킬까 했었는데 낮술은 좀 그런 것 같아서 참았다가 스테이크 부터는 느끼했다고 고백. 다음에 여기서 코스를 먹을 때는 술을 한잔 곁들여야 할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닌데 어떤 블로그에서 여기 와인 코키지가 만원이라니까 여럿이 갈 때는 두어병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음.
하나하나 따지면 다 맛있고 훌륭한데 아쉽다면 한식 치고는 너무 고기가 많아서 좀 무거운 느낌. 밀땅이 부족하다고 해야하나... 뭔가 중간에 상큼하고 가벼운 게 하나 들어오면 좋을 것 같다. 고기교 신자들과 많이 먹는 남자들, 특히 반주가 어울리는 식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세를 부르며 환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스테이크 이후에 나온 잡채는 맛은 있으나 내게는(내 일행들에게도)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다음에 또 방문해 호평 받는 비빔밥이나 다른 요리들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게 됨.
4만4천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 정도 재료로 이 정도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음식이라면 돈값을 충분히 한다고 결론을 내렸음. 동네에 초록바구니가 예전엔 이런 느낌이었는데 올 여름에 메뉴 개편하고부터 이 돈을 내고 이런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아!로 바뀌어서 아쉬웠는데 좋은 곳을 찾은 느낌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 일행에게 이 식당의 절대적인 장점은 음식이 하나도 안 짜다!!!! 정말 감동이었음. 하지만 간을 세게 먹는 사람들에겐 이게 감점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드레싱과 소스가 매번 곁들여지니까 간 조절은 그걸로 가능할듯.
위치는 이태원 제일 기획 옆. 주차는 근처 유료 주차장에 세워야 하고 일요일은 쉰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