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고구려에 관한 책을 써주고 있는 저자의 책. 한국사에 관한 이런 류의 개설서를 고를 때는 아무래도 저자 이름이나 이전의 책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분은 고구려에 관한 한 -내 관점에서는- 상당히 꼼꼼하고 도움이 많이 되는 탄탄한 글을 내준다.
인물을 통해서 시대를 읽는다는 방향성을 갖고 고구려의 시작인 추모왕 (혹은 동명성왕, 주몽왕)부터 시작해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부터 고구려의 멸망을 지켜보는 보장왕, 부활운동을 해 발해를 건국하는 기초를 세운 대중상까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발전, 전성기 때까지는 즐겁게 술술 읽어지지만 예정된 멸망이란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후반부는 아무래도 읽기 싫어지는 관계로 지지부진. ^^; 이건 저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보기 싫은 결말을 가능한 미루고픈 독자의 괴벽이니 신경쓸 부분은 아니고.
고구려 역사의 기록이 워낙에 빤하다보니 대체로 잘 알려진 왕이나 장수 같은 인물 중심이긴 하지만 균형을 맞춰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상당히 개입되었는지 도림이나 승랑 같은 승려, 다른 왕조에서는 감히 나오기 힘든 여성들의 힘을 보여주는 우씨 왕후나 부여태후 같은 인물들도 소개되기 때문에 상당히 다채롭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로 역사를 죽 풀어준 다음 마지막 장에선 고구려인들의 삶과 사회적 특징에 대한 정리와 왕의 호칭, 표기법 등 조금 더 깊은 정보를 얻고픈 독자들을 위한 세세한 정보가 있어서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음.
역시 이 저자가 쓴, 몇년 전 감탄하면서 읽었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 때처럼 신선한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살뜰하고 알뜰하니 잘 정리된 고구려 밥상을 받은 느낌이다. 아쉽다면 먹어본 반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이건 사료라는 재료의 한계가 있으니 역시 저자 탓을 할 수 없음.
몇해 전, 반세기 가까이 지지부진하던 히타이트학의 기존 학설을 완전히 쓰레기로 만든 획기적인 발굴과 해독을 한 비르기트 브란다우가 자신의 책에서 '이 책의 내용을 다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기록과 유적이 발굴되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을 저자 서문에 썼었는데... 부디 우리 고구려학에도 그런 기적이 있으면 좋겠다.
이건 본론과 전혀 관계없는 여담인데, 저 히타이트라는 책이 번역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출판된 유일한 히타이트학 관련 서적은 1950년대 이론을 번역한 '발굴과 해독'이었다. 그리고 저 '히타이트'가 번역되기 이전에 히타이트를 배경으로 한 일본 만화가 한국에서 꽤나 히트를 쳤었다. 그때 그 만화를 보면서 참 대단한 상상력이다~고 감탄을 했었는데, 나중에 번역된 히타이트를 보니까 실제 역사와 발굴된 일상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거였었다. 그 만화가 당시로는 한국에 나온 가장 최신 히타이트 정보서였던 셈.
그래서 다시 감탄한 게, 우리나라에선 극소수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모르고 있었던 정보를 이미 대중화해서 만화로 풀어내고 있었다는 거였다. 그 만화가가 히타이트학의 거장인 일본인 ??? 박사에게 감사한다는 얘기를 책에 종종 썼었는데 아마 그의 자문을 받아서 최신 고고학 정보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싶음. 가장 쉬운 대중 예술과 통섭하는 어려운 고고학... 그런 열린 자세가 부러웠음.
각설하고.... 고구려 때 누군가 어디 동굴이나 땅속에 파묻어놓은 역사책이 무더기로 좀 튀어나와주면 좋겠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쓰레기가 되어서 다시 처음부터 삽질을 하고 헤딩을 해도 상관없음. 깜깜하고 좁은 방안에서 바닥에 떨어진 낱알을 하나씩 줍는 기분이랄까. 문외한이고 외부자인 나도 이런데 전공자나 관련자들은 정말 갑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