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노 대학의 정치학 교수라시더니 정말 쏙쏙 빨려들도록 얘기를 재미있게 잘 하신다.
우리 프로그램의 포커스가 미주에서 한인 독립운동이었으면 좀 더 많은 얘기들을 끌어내고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참 아쉬움.
그런 걸 제쳐두고 보면 이 인터뷰 역시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과연 이번 정권 5년 간 독립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한숨만 푹푹...
Q)한국 이민자들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0020 시작하기 전에 제가 기구의 명칭부터 바로 잡겠습니다. Central California Korean Historical Society입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 지역의 역사 기구들을 모델로 하여 설립하였습니다. 이런 기구들은 Historical Society 라고 불리며,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거나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입니다.0104
우리가 이 아이디어를 모은 것은 한-미 이민 역사100주년을 맞아 200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 기구의 형태를 장려했고 기금을 모았으며, 또한 지역의 기금도 모아 만들어졌습니다. 0129
몇몇 사람들(?)이 다뉴버는 이 지역의 뒷마당인데요. 많은 시민들이 이 역사에 대해 모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기구를 정보를 널리 알리고 역사적 중요성을 공론화하기 위한 기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공부를 하게 되면서 해야 할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0209
두 번째 동기부여는 우리는 미국에서 자라고 태어난 2세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의 선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자기 확신에 중요한 첫 단계이며, 어떤 인종적 차별에도 저항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때때로 아주 드러나기도 하고 때때로는 은밀하게 이루어지죠. 0300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 이 역사적인 지역에 대해 대중이 알게 하기를 원했고, 다음 세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또한 자기인식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모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9개 이사회와 34명의 정회원 멤버들이 가입했습니다. 0349
잠시 마이크 조정중..
0410 이 기구의 프로그램 예를 들어주면?
0422 우리는 아주 많은 일을 했습니다. “리서치 프론트“를 먼저 얘기하겠습니다. 이 지역에 살다가 죽었던 사람들을 발췌하였고 그들에 대한 비디오를 만들고,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완성하여 책 자체가 다음 세대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특별한 점들은 한국어보다는 영어로 표기르 했습니다. 0513
진행 중인 노력에는 기념비를 세웠고요 독립문처럼요. 그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샌프란에 있는 교회에 이어서 두 번째 교회로 Donuever Korean Presbyterian Church를 1912년에 지었습니다. 교회 설립과 추모는 한국이민 역사에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903년 초부터 1905년까지 7000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왔습니다.0603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 커뮤니티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대게 선교사들이였고 그들은 고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사는 것에 대해 아주 이상하게 여기지 않죠. 세계 곳곳에 퍼져 살죠. 항상 선교 활동에 노출되어 살기 때문이죠. 0630
여기 미국에서 대게 이민자들의 역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이민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미국에 왔고 공부도 하고 정착하여 살기 위해 왔죠 0702
Q) 한국 이민자들이 어떻게 왔나?
0718 지난 역사로 다시 돌아가 얘기하면, 1882년에 미국과 한국은 한미우호조약 Treaty of Commerce and Amity 에 서명을 했는데 Amity는 우정을 의미하죠. 그 조약은 한국과 미국이 서로 여행이 가능하고 서로를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그때 학생이나 외교관은 가능하지만, 예를 들어 상인은 가능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주 오래된 유교적인 사상으로 상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0815
반면에 미국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처음으로 갔습니다. 경기도에 처음 기독교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졌고, 그리고 나서 평안남도 지역에, 중국과 경계인 곳에, 기독교 커뮤니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중심부와 북서부분이 기독교 커뮤니티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0855
그리고 나서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에서는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설탕수수농장과 캘리포니아 농경 지역에 필요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백인들은 고된 일을 열심히 일하기 싫어했다. 중국인, 한국인, 필리피노, 멕시칸, 흑인들이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이죠. 중국인이 가장 먼저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 처음 왔고 그 때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처음 발견됐다.0955
1882년까지 중국인이 계속 들어왔는데, 그때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 해에 우리는 한미우호조약이 끝이 났는데, 1882년에 미국은 Chinese Exclusion Act를 통과시켰습니다.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중국인들이 미국에 일하러 오는 것을 막는 조약입니다. 왜냐하면 백인들이 생각하기에 중국인들이 모든 좋은 일자리를 모두 가져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인을 배제했죠. 하지만 더러운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 중국인은 중단되었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 일본인이 1885년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106
그러는 동안 하와이를 1889년에 정복하여 미국 영토가 되었다. 하와이는 중요한 상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좋아하는 설탕이었다. 하와이 설탕 공장을 현대화하고 산업화시키기 위해 또다른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일본인들은 효율적으로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1205
그런데 그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싸웠습니다. 일본인은 일은 똑똑하게 잘했지만 요구사항이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파업도 강행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안을 하게 되었는데 아시안 인종 중에 아주 순응적인 인종이 있다고 했고, 그들은 바로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우린 못 들어놨는데? 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중간쯤 되지. 그리하여 한국인들을 설탕수수공장의 가능한 인력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311
한국은 그때 아직 왕조였고, 미국대사와 동등한 지위가 있던 그때는 Embassy가 아니었고 legation(공사관)이였다. 의학 선교사 Horrace Allan은 이민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 이름을 얘기하겠습니다. 그가 고종에게 처음으로 제안을 했습니다. 그가 고종의 국민들을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 허가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1355
그러나 왕은 거절했습니다. 내 사람들을 거기에 보내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우리 선조들의 무덤을 지킬 것이냐? 예전 유교사상에서는 선조들의 땅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앨랜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화와이에서 일하면서 좋은 임금을 받을 것이고 한국왕조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1440 전화벨 소리~~중단
1447 왕을 허락했고, 첫 배가 12월 21일쯤에 인천을 떠나서 1월에 화와이 호노룰루에 도착했습니다.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62개의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 했습니다. 그들은 1905년에 들어왔고 한국인들이 들어와 일본인들의 인력을 대체하게 되자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고종에게 더 이상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게 되었습니다. 1535
그리하여 1905년에 멈추게 되었고 최종으로 7000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온 첫 번째 한국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대략 50%는 기독교 사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와이의 여러 섬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1610
-> 하와이 한인 이주의 역사.
이번 프로그램에서 길게 언급될 건 아니지만 스치듯 써먹더라도 일단은 필요할듯.
수수가 아주 길이가 크기 때문에 아주 긴 페치로 잘라내야 합니다. 그 주위 여러 가시로 잘라내야 하고. 허름한 곳에 살았고 김치 같은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려웠습니다. 몇 달 살자 그들 중 몇몇은 메인랜드로 가면 임금이 좋고 삶이 더 좋을 것이다 라는 루머를 듣게 되고 2000명 정도가 웨스트코스트(미서부) 즉, 캘리포니아로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와이에 왔다가 첫 번째로 미대륙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Wave(이동)입니다. 1717
2000명 중에서 대략 3분의 1정도가 농경인으로서 캘리포니아의 중앙지역, 새크라멘토 북쪽부터 베이커스 필드까지,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대게는 다뉴버에 정착했지만 작은 농경 마을로, 지금은 들어보기 힘든 곳으로서 메리즈 빌, 윌로우즈, 맥스웰에도 몇백명은 흩어져 살았습니다.1828
땅을 소유한 부유한 농작인이 아니라 그저 먼지와 싸우는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그들은 태양이 뜨고 나서부터, 어떤 책은 태양이 뜨기 전에도 일어나서 일을 했고 태양이 지고 돌아왔습니다. 1853
10-15센트를 한 시간에 벌면서 밥과 피클을 먹고 살며 고기는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먹고 우유는 구하기가 힘들고 등등 삶이 아주 어려웠을 것입니다.1919
또한 인종차별이 아주아주 심했습니다. 요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발소에 가지도 못합니다. 중국인이나 필리피노들이 하는데 밖에 갈 수 없죠. 백인들이 하는 흔한 약국도 갈 수가 없죠. 식료품점도 중국인이 하는 곳만 가야하죠, 극장도 정해진 구역에 밖에 갈 수 없었죠. 그러나 단, 그들에게 한 가지 삶의 의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2014
-> 사용할 인터뷰. 직접 들으면 정말 가슴이 뭉클하다.
그들의 활동은 어땠나? 2030
한국을 떠났을 때, 1903년에서 1905사이에, 한국시민이였고 한국에서 받은 여권을 가지고 왔죠. 그런데 1910년쯤, 7년이 지난 후에는 한국이 모든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죠. 한국이 일본의 일부가 된 것이죠. 더 이상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2128
그들이 가지고 온 여권조차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죠. 한국을 국가로 아무도 인식하지 않았죠. 일본인들은 아주 성실하게 모든 한국인 이민자를 찾아내었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2145
지금 가지고 있는 한국여권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대신해 일본 여권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 때 여기에 온 한국 이민자들은 그것이 아주 좌절스럽고 모욕적 실망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여권을 바꾸기 위해 일본 영사관나 대사관에 가지 않았습니다. 2215
그러나 몇몇은 바꾸러 갔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것이 발견이 되면 한국 사회에서 그들은 완전히 배제가 되었죠 2230
-> 이것도 사용할 인터뷰.
좀 길어서 끊어내야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냥 다 쓰기로.
대신 중간중간 한국 이민과 독립운동 협력 관련 사진들을 넣기로 했음.
따라서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생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이승만과 같은 사람, 또 미국에 살았던 아주 중요한 애국자는 필립 제이슨(서재필)입니다. 그 세 명과 박용만까지 이렇게 4명이 정치적, 도덕적 리더십을 한국 사회에 발휘했습니다. 2242
그들에게는 두 가지 동기부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동기부여는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고국에 존경심을 표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2406
-> 역시 가슴 뭉클한 부분이긴 한데... 이번엔 못 씀. 아깝다... ;ㅁ;
세 번째로는 그들이 미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 이민자들을 아웃사이더로 여깁니다. 미국시민이 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죠. 1790년에 법이 있었는데 그때는 오직 백인이나 유럽 혈통 사람들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법이 있었죠. 따라서 미국에서 일하고 살지만 법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죠. 2455
백인 사회는 절대 그들을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죠. 시민 삶은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도 차별받고 있었죠. 그들의 삶의 의미는 고국의 독립에서 찾을 수 있었죠
2615 다뉴버 지역은 한국인이 1906년부터 정착한 곳이고, 1912년부터는 인구가 많아져서 교회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죠 그때 1912년에 교회를 짓게 된 것이죠. 교회는 종교적인 기능 그 이상의 기능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이였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일자리는 어디서 얻으며 쇼핑은 어디서 하며.. 등등 또한 정신적 활동을 하기도 하며 또한 정치적 모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죠. 상하이임시정부를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야하며 등등이죠. 교회에 대한 역사적 활동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활동에 대한 가치부여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든 사회적 정치적 열망들을 기리는 일이죠 2740
그리고 그들의 고국에 대한 열망을 1990년 3월1일 독립절에 축복하였습니다. 7월 4일 미국독립일과 같은 날이죠. 그 때야 말로 한국인들이 아주 용감하게 일본인들이 나라를 떠날 것을 대규모로 시위했던 날입니다. 이 대규모 운동은 3월1일에 시작하여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해에 걸쳐 계속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많은 인명 피해와 사고가 따랐습니다. 2835
이민자들은 많은 기금과 서신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했지만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3.1절 1주기는 다뉴버에서 시작되었고 35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큰 숫자입니다. 2926
교회는 1912년에 설립되었고 올해 2012년이기 때문에 정확히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아주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정부가 아주 크게 우리를 장려했고 가능한 정확히 그 날에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고 <다뉴버 센테널> 신문사에서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아주 자세히 보도를 했습니다.
한국 역사에 남기는 의미는? 3128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한국이 지역사회로서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수인종으로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같은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도 물론 같은 지역사회로서 근간을 마련해주지만, 고국을 되찾고 고국의 훌륭함을 되찾는 것은 그들에게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그들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고 투쟁하면서 낯선 나라에서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고 돈도 많이 없지만 그들의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단력은 그들의 인생에 큰 의미를 갖습니다. 3245
두 번째로는 다음 세대에 이어져 그들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대들은 부모님들이 왜 떠나온 나라에 대해 저렇게 열정적인지 이해를 잘 못합니다. 한국에 대해 얘기하지마세요 왜 상관이에요 라고 생각한다. 3332
그들은 한국을 가능한 빨리 아예 잊고서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죠. 미국에서 한국은 노란피부를 가진 아웃사이더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런 고뇌를 갖죠. 한국의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3408
그런데 고국에 대한 부모님의 열정이 나중에는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의 문화와 유산에 속해있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 고유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특히 1948년 독립 이후 그들은 깨닫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원천을 찾게 되죠. 그것 또한 중요한 점입니다. 3445
세 번째는, 미국과 한국은 1882년부터 시작된 지난 100년이 넘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미국에게서 한국의 운명이 미국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미국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립운동은 백인들이 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는데 다리 역할을 해주었죠. 한국 이민자들 역시 우리 이웃에 대해 더 이해를 잘 하게 되었죠. 그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