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쪽에서 5쪽 모자라는 하드 커버의 흉기 수준인 책. 베개로 써도 가능한 두께였다. 이걸 사면 지식의 원전을 줬던가 지식의 원전을 사면 이걸 줬던가? 하나를 사면 하나를 공짜로는 주는 이벤트에 홀려서 그냥 지른 책.
그런데 도착한 다음 그 무시무시한 두께를 보고 읽을 의욕을 잃고 내버려뒀다가 9월에 잡았다. 자기 전에 최소 3챕터씩 읽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 그러나 내용이 그렇게 취침 전에 말랑말랑하니 읽을 내용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꿈자리를 사납게 하는 내용이랄까.
존 캐리는 어떤 사건의 현장에 있었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시대순으로 뽑아놨다. 저자가 영국인인 만큼 그 내용의 무게나 중심이 상당히 영국에 실려있지만 전체적인 비율이 책의 가치를 덜어낼 정도는 아니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글이 아니고 남의 글을 뽑아낸 것이기 때문에 책을 편집한 저자(라고 해야하나?)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던 것도 강점이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전쟁과 살육의 역사가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 마구 치닫게 한다. 꼼꼼히 따져본건 아니지만 대충 내용의 80% 이상이 전쟁과 내전, 혹은 인간들끼리 다툼으로 인한 어리석은 희생들에 대한 기록이다.
최소한 이 책의 기록만을 놓고 볼 때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얘기는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낙관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정도로 상대에 대한 증오와 전쟁, 살육은 세대를 거듭하고 현대로 올수록 그 잔혹도나 규모가 더 커진다.
구성이나 내용 자체는 짤막짤막하니 호흡이 빠르지만 평균적인 정신 상태와 이성을 가진 인간이 수면 전의 휴식거리로 즐기기에는 좀 버거운 알맹이. 18세기 정도까지 진출한 다음에 소화불량으로 잠시 중단했다가 지지난주에 파마하러 간 날 미용실에서 2/3까지 끝내고 오늘 나머지를 끝냈다.
오늘은 2차 대전과 그 이후에, 한국 전쟁을 포함해서 반복되는 인간들의 살육과 파괴, 보복의 기록들을 읽어줬음. 1970년대 직전에 끝이 났는데... 누군가 그 이후를 엮어낸다면 어떤 얘기들이 추가가 될까?
읽는 사람들이 잘 모를 사건이나 인물 배경에 대한 한국 편집자의 '주'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독자의 수준을 너무 높게 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들었음. 많지는 않았지만 글을 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좀 알려주면 좋겠다는 인물들이 있었다.
조금 쉬어준 다음에 시리즈인 지식의 원전도 읽어볼 예정이다. 바라건데 이번엔 인간들의 토악질 나는 추함의 기록이 아니길.
책/인문(국외)
역사의 원전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은이) | 바다출판사 | 2006.9.?-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