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파르지팔에 이은 또 다른 바그너 오페라와의 만남~
바그너의 오페라가 워낙에 가수의 체력을 모조리 뽑아가고 무대 장치며 규모 등등 다 스펙타클하다보니 어지간해서는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바그너 작품을 공연하는 가수들에게 바그너 가수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줄 정도.
한국에선 내한 공연이 아니면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잘 먹고 큰 세대라 그런지 우리나라 성악가들도 바그너를 공연할 스케일이 있는 사람들이 제법 나오다보니 이제는 주연은 해외 가수들을 초빙하고 어쩌고 하면 무대를 만들 여력이 되는 것 같다.
사이비 바그네리안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참 고마운 상황. ^^
올 봄에 예매 뜨자마자 바로 예약하고 몇달을 기다려서 지난 11월에 홍콩 가기 전 금요일에 봤다.
그때 바로 감상문을 썼어야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 디테일들은 다 사라졌지만 굵직굵직하게 남은 기억들만 정리를 하자면...
요즘 추세인지 굉장히 현대적인 연출.
의상도 배경도 현대, 많이 뒤로 가봐줘야 20세기 중후반이다.
1막과 3막은 별 상관없지만 2막에선 괴리감이 좀 심하게 많이 느껴졌음.
노래들을 워낙 잘 하니 넘어가긴 하는데 뭔가 좀 어색하고 집중이 되지않았다.
십수년 전 바이로이트를 경악에 빠뜨려 보이콧 사태까지 일으켰던 그 포스트 모던에 경악했던 취향의 소유자라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하기로 했음.
서막과 중간중간 영상을 활용한 건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초반에 했으나 과유불급.
바다 위를 정처없이 나는 갈매기(겠지? 알바트로스인가?)를 끝없는 항해의 저주를 받은 네덜란드인 선장에 대치시킨 상징성은 좋았지만 그냥 관객들의 상상력과 음악적 이미지에 맡겨도 될 것을 영상에서 너무 많이, 자세하게 보여준 건 별로였다.
음악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미술과 연출에 대한 취향 차이를 제외하고는 아주 만족한 저녁.
오페라나 발레 스토리를 보면서 개연성을 따지는 건 미친 짓이고(이건 드라마를 중요시한다는 바그너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물론 바그너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오페라는 닥치고 노래를 잘 해야 함.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괜찮았고 주역급 솔리스트들은 정말 바그너 음악은 이런 것이지~를 보여주는 연기와 성량을 보여줬다.
한국 성악가들이 과거와 달라진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노래 뿐 아니라 무대에서 연기가 된다는 것 같다는 생각을 공연을 보는 내내 했다.
연광철 교수 팬이라서 일부러 그가 달란트로 나오는 20일을 예매했다가 캐스팅이 바뀌는 바람에 좀 걱정했는데 김일훈 씨도 염려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묵직하니 제대로 된 음성과 연기를 보여줬다.
에릭과 마리, 조타수도 한국 성악가들이 노래했는데 이제는 국내 성악가 캐스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온 것 같기도 하다.
네덜란드인을 맡은 유카 라질라이넨과 젠타 마누엘라 울은 말하면 입 아픈 노래~
링은 언감생심이고(게~ 짜르께선 한국 다시 좀 안 와주시려나...) 몇년 안에 로엔그린이나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정도는 국내에서 공연을 해주면 좋겠다.
내년 공연 라인업이 나올 시기인데 슬슬 체크해서 예매 준비에 들어가야겠구나.
아마 이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이 올해의 내 마지막 공연이 아닐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