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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국군의 날 영상 사고

by choco 2022. 10. 21.

이메가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 어쩌고 저쩌고."에 학을 떼서 이메가 치하 이후에 어지간하면 내 영역인 동네에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걸 모토로 살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고 오래 안 보니까 내가 아는데~를 가끔은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중국 탱크가 등장해 난리 났던 국군의 날 영상.  사실 그때 욕하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제 친한 감독이랑 오랜만에 긴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화제가 거기까지 간 김에 이 바닥에서도 그리 흔치는 않은 강산이 바뀌는 세월 동안 육해공 가리지 않고 섭렵한 국군 영상물 시조새 작가로서 잠시 끄적끄적. 

두괄식으로 풀자면, 일단 그 사고를 낸 건 99.99%의 확률로 국방부 영상 하던 기존 회사가 아니라 김건희 라인에서 이거 해먹으라고 새로 꽂아넣은 새 팀이었을 거다. 

국방부 포함 군대 영상물은 커다란 의미에서 틀이 확고하게 있다. 입으로는 항상 재미있고 참신하고 새롭게를 외치지만 그 내용은 쓸 수 있는 용어며 자료, 그림이 명확하게 정해져있고 모든 연출은 그 안에서 움직어야 함.  하다못해 예비군 훈련영상도 군대 용어를 써줘야지 일반적인 구어체를 쓰면 정훈 장교들이 다 수정을 해줌. 

선수끼리 그림이라고 부르는 영상의 경우는 더 엄격함.  대본 단계부터 어디서 나온 그림인지 출처 다 명시해줘야 하고 그렇게 확인 다 하고도 단계별 시사 때마다 조금이라도 애매하거나 위험한 건 가차없이 잘려나감. 

군대가 어느 정도로 융통성 없는 꼰대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몇십주년 이렇게 0으로 떨어지는 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돈을 쓰는 영상이라 CF 연출 출신의 배테랑 감독이 투입됐다. 마침 의욕 충천인(=물정 모르는) 신임 정훈장교와 서로 손발이 착착 맞아서 전차 부대에 포병, 헬기부대까지 어렵게 동원해서 엄청 근사하게 찍었다.  마침 날씨도 잘 받쳐줘서 뒤에 햇살이 좍~ 비치는 가운데 언덕 위로 전차가 두둥 하면서 등장해 다가오고 그 위로 헬기가 날아가고... 정말 육군답지 않은 퀄의 영화 같은 영상이 나왔다.  이걸 도입부로 근사하게 풀 예정이었는데 높은 양반들 시사에서 딱 걸려서 피눈물나게 섭외해서 찍은 영상은 날아갔음. 

이유가 뭐다?  국군에 저렇게 움직이는 작전은 없다. -_-a 

교육물도 아니고 홍보 영상물에도 연출이 만들어낸 과장은 인정할 수 없는 게  군인들임.  구성부터 납품까지 정말 토나오게 물고 뜯고 잘근잘근 씹어댄다. 개당 단가는 높지 않지만 각종 교육물 등등 시시때때로 엄청나게 발주가 나옴에도 군대 영상물 하는 회사가 많이 없는 건 '까라면 까라' 의 무대포의 수정 요구 + 토씨 하나까지 다 챙겨대는 깐깐함을 견디면서 손해를 보지 않을 내공을 가진 팀이 많이 없기 때문에.  어렵게 뚫고 들어온 회사들 대부분이 한번 하고 만세 부르고 사라진다. 그들도 자신들이 엄청난 진상인 건 알기 때문에 그 진상력을 견딜 수 있는 회사(=팀)를 선호하고 그러다 보니 고인물 세상이 되어 버림. 

저 카르텔을 뚫고 들어가는 건 저들의 취향에 딱 맞고 눈에도 확 띄는 기획력을 보여줬거나 어마어마한 라인이 내려온 것.  국방부 일 처음 하는 회사는 사고 칠까봐 정훈장교들이 초긴장하면서 토씨 하나까지 붙잡고 엄청 쪼는데 저런 사고가 난 걸 보면 그들이 세게 입을 댈 수 없는 라인이었지 싶음.  아니면... 정훈 병과가 그거 하나 걸러내지 못할 정도로 당나라 군대가 되었던가.  근데 후자일 확률은 낮다고 보는 게 그쪽 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의 의견. 

그러고 보니 작년까지도 국방부 일 열심히 하던 감독... 무사한지 궁금하네.  워낙 좁은 동네라 거기 물어보면 그 사고의 내막이 줄줄이 나올 텐데 그거 궁금해서 연락하긴 좀 민망하니 일단 패스.  다음에 같이 일 할 때 어느 라인인지 물어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