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20세기 때지만 당시 나름 유명하다는 역술가며 무당들 취재도 했던 터라 역술이니 무속에 관한 내 의견은 민속학적 데이터 + 유산 + 전통적인 방식의 심리 치료 등으로 호불호를 따졌을 때 호에 가까웠다. 물론 이건 감정적인 미지근한 호감이지 여기에 많이 의지하거나 특히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여하튼, 짧은 기간 잘 나간다는 영험한 양반들을 만나보면서 이런저런 금기며 평소에 사용할 수 있는 민간 주술 등을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었다. 그건 당시엔 '오! 그런 의미가!'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 용산에 들어앉은 돼지와 그의 자칭 무당인 그 성형괴물의 행보를 보면서 켜켜이 파묻혔던 기억들이 먼지를 털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영정도 사진도 하나 없는 곳에 조문이랍시고 부부가 나란히 갔다가 그 마누라는 하얏트 빵집에 들러서 빵 사온 걸로 -뉴스에는 안 나고 목격자들의 SNS에서- 난리가 났을 때 '그렇게 빵이 먹고 싶으면 시키지, 뭘 그걸 사러 직접 가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상가집 갔다 집에 바로 안 가려고 들른 거 아니냐는 소리에 아! 하고 떠오르는 기억.
그때 뵈었던 무당 중 누군지는 기억 안 나는데, 한 양반이 상가집 갔을 때, 귀신을 만났을 때 -등줄기가 싸해서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으면 그건 떠도는 영이 따라오는 거라고 함-는 절대 바로 집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함. 가까운 구멍가게-당시엔 편의점이 없었던가 거의 없었던가 그랬음-나 수퍼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문 여는 엄청 강조) 껌이라도 하나 사서 버리고 오라는, 잡귀나 원혼을 떼어놓는 일상 속 생활의 지혜를 전수해줬음.
귀신은 항상 따라온 사람이 처음 여는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힘. 왜 다시 못 따라나오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혼날까봐 무서워서 그건 못 물어봤다. 김건희의 하얏트 빵집 얘기가 나온 김에 저 얘길 다른 작가에게 했더니 그 친구 어머니도 상가집 다녀오면 꼭 그러신다고. 그럼 귀신을 아무 관계없는 남에게 넘기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가 등짝 스매싱 당했다고 함. 이 친구 어머니는 교회 다니던 분. ^^;;; 한국 사회에 무속은 정말 깊숙이 들어와있구나를 느끼는 대화였다.
그리고 날마다 문상 가는 거 희한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김건희가 5로 떨어지는 거 엄청 좋아하고 무속에 목숨 걸기 때문에 5일 꼭 채울 거라는 글을 보면서 왜??? 했는데 오늘 5일 채우는 거 보면서 아~ 또 하나가 가물가물 떠오름.
이건 당시에도 나름 심오했던 얘기라서 자세한 내용은 다 떨어져나갔고 남은 파편만 주섬주섬 떠오르는대로 뿌려보자면, 오방색, 오방 이런 것처럼 5가 무속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숫자였던 것 같음. 나쁜 게 다 떨어져나가고, 완성이 되고 만사형통의 그런 류? 1,3,5,9 등 숫자에 관해서 역술가 양반에게 뭔가 많은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오라는 사람 없고 환영하지 않는 곳에 기어이 5일을 채우는 걸 보면서 정말 그 5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구나~를 확인하면서 역시 5로 딱 떨어지는 저 집 전속무당의 오피스텔 주소가 팍 떠오름. 이사 갔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빨리 가라고 기도 중. 벼락 맞을 놈 옆에 살고 싶지 않음- 705호다. 무당이나 역술가들은 전화번호, 집 주소도 숫자 엄청 따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의미를 두고 얻은 집이 아닐까 했는데 이렇게 또 연결이 되네.
조선 역사책 볼 때 성리학자들이 성수청 없애고 소격서 혁파하자고 왕을 들들 볶는 걸 보면서 뭘 저런 것까지 못 잡아 먹어서 난리인가 했는데 성리학자들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조광조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성리학자 선생님들, 쪼잔하다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옳았네요. 멍청한 위정자와 무당이 결합했을 때 그 피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몰랐던 무지한 후손을 용서하시길.
그러고 보니 민비도 무당에게 ~~군 칭호도 주면서 엄청 싸고 돌다가... 나라 말아먹은 부분은 빼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