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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성북동 나들이. 특히 길상사.

by choco 2023. 10. 27.

여름 내내 달린 큰 마감 하나 끝내고 요즘 무기력 + 우울증 모드로 만사가 귀찮은 상태. 

그래도 미국에서 오랜만에 들어온 ㅇ 언니에게 약속한 맛간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다른 언니들과 성북동으로 고고~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삼청동 -> 성북동을 올라가서 성북면옥에서 점심 먹고 성북동 빵공장에서 빵 사고 차 마시고 길상사 가서 산책하고 귀가. 

성북면옥은 키 크고 잘 생긴 남자 종업원으로 접객하는 컨셉을 만든 것 같긴 한데... 눈요기도 좋지만 키 작고 못 생겨도 친절함과 세심함 장착이 카페가 아닌 식당에선 더 필수라는 걸 살짝 망각했지 싶다.  키오스크 주문이 헷갈려서 뭐 물어보면  오묘하게 틱틱거리는 분위기에 무엇보다 옆 테이블 치울 때 뭐 깨지는줄 알았다.  뭘 그렇게 쨍그랑 요란 난리법석인지.  음식은 요즘 시대에선 그나마 덜 달아서 먹을만하다만 서비스는 애매함. 

바로 아래로 연결된 성북동 빵공장은 계단이 너무 가팔라서 (엘리베이터 있는데 내가 못 찾을 걸 수도 있음) 아직 다리 튼튼할 때 열심히 가봐야 생각이 들었다. ^^  빵값 나쁘지 않고 (이건 우리 동네 빵값이 너무 미쳐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음) 맛도 괜찮고 워낙 층층이 공간이 넓어서 그런지 분위기도 조용하니 좋음.  성북면옥에서 밥 먹은 영수증을 내밀면 10% 할인도 해줌. 

여기도 종업원들이 손님의 버벅임과 실수를 열심히 지적하는, 결코 친절하달 수는 없으나 잘 되는 가게의 특징이려니~  맛 좋고 가격 괜찮으니까 그냥 패스. 다시 볼 사람들 아니니 피차 그렇다 살다 가는 걸로.  게으른 내 특성상 빵 사러 일부러 가진 않겠지만 근처에 가면 빵 사러 들를 의향은 있다. 

길상사는...  그 사연을 떠올리며 걸으니 왠지 오묘하니 좋았다. 특히 바람에 나뭇잎들이 휘날릴 때는 서울 한복판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어느 세계에 잠시 속했다가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  한때 최고의 요정이 절이 되고, 기생들이 살던 공간에 승려들이 사는 걸 보면 범상한 장소는 아니긴 하다. 

길상화 보살과 백석의 로맨스는 자야, 길상화 보살 김영한의 짝사랑이었는다는 주장이 요즘 유력하게 나오고 있으나, 아니어도 큰 상관없는 진실은 그냥 낭만으로 포장되어 영원히 묻히면 좋겠다.  일부는 혼자만의 망상이었다고 주장하는 그 지극한 사랑 덕분에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지.  법정스님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대원각에게 상속되거나 국가에 귀속되거나 했다면 그 자리에 어떤 흉물이 들어섰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쫙이다.  특히나 돈독 오른 이명박이나 오래된 거에 웬수 진 돈독 오세훈 손아귀에 지금 길상사가 있었다면... ㄷㄷㄷㄷㄷㄷㄷ  상상하기도 싫음. 

법정스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길상사를 다녔다는 ㅎ언니는 스님이 돌아가신 뒤 새로운 주지스님들이 길상사를 개보수한답시고 여기저기 뜯어 엎어놔서 법정스님 계실 때의 그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훼손됐다고 안타까워하던데 훼손된 게 이 정도면 본래는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게 됨. 

피곤하긴 했지만 우울과 무기력에서 조금은 빠져나오게 해주는 나들이.  내년에 ㅇ언니 오면 성북동 칼국수 먹고 가구 박물관 가기로~   내년 가을이 기대된다. 

눈에 담기도 바빠 사진은 안 찍어서 동행자들이 찍은 가을 풍경 몇장만~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