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가 이미 2차였고 수면부족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빈티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03년이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불확실한 정보.
월, 화, 연짱으로 밤샘. 시작부터 마감까지 비슷한 스케줄로 돌아가는 두개가, 황당하게도 수정까지 통상보다 빠른 타이밍으로 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다. ㅠ.ㅠ 보통 대본이 넘어가면 수정은 그 다음날에 오는게 예의(?)건만. 양쪽 다 당일 피드백이 오는데다가 슬슬 본격적인 발주시즌이다보니 다음 일도 시동이 걸리고. 3월부터 다시 취미 생활 재개하려고 했는데 당분간 좀 힘들 것 같음. ㅠ.ㅠ
6시에 여의도에서 회의하고 다시 교대로 날아가 또 다른 일 회의. 거북곱창에서 간단히 먹고 사무실로 가서 회의하기로 했는데, 쓰는 김에 간단히 기록을 하자면 교대 앞에 거북곱창이라는 곳. 맛이 괜찮다. 왕십리 중앙시장의 그 무슨 아줌마 사진이 간판에 크게~ 걸린 그 연탄불로 구운 곱창집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깔끔하니 냄새도 적고 꽤 먹을만한 수준인듯.
빡세게 1시간 정도 회의하고 교대 근처의 발렌티노라는 bar로 이동.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서빙하는 아가씨들이 모두 음대생이라 시시때때로 피아노 연주나 다른 악기, 노래 연주를 들려준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사람이 많아서 피아노 연주만 간간히 들려주는데 해주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 조율 좀 하시구랴.... -_-;
그리고 별 상관없는 호기심이지만 서빙보는 음대생 아가씨들의 시급이 얼마일까. 레슨이나 하다 못해 피아노 학원을 뛰어도 전공자들은 용돈벌이가 충분히 되는데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웨이트레스들에게 후터스 이상의 집적임이나 기대는 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사회적 통념이란 게 있는데... 그걸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받는 건가?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내가 음대생 타이틀을 달고 만약 이런 곳에서 일했다면 난 머리 박박 깍여서 감금당했을 텐데... 시대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헷갈림.
다들 다음날 할일들이 있는 사람들이고 평일이다보니 와인으로 가는 분위기라 달지 않으면 좋겠다는 내 요구를 가납해 메뉴에 있는 유일한 샤블리를 시켰다. (와인바가 아니라 양주 위주의 바가 되다보니 와인 리스트가 별로 길지가 않았다.)
첫 방울을 입에 머금은 순간 일단 엄청 놀랐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셔본 샤블리와 너무너무 다르다. 샤블리는 보통 가볍고 상큼하게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파스텔톤의 아가씨를 연상시키는 품종이다. 그런데 얘는 샤도네이를 찜쪄먹을 묵직~한 바디.
이게 뭔 일이냐? 하면서 샤블리 치고 너무 무겁다고 했더니 와인을 엄청 좋아한다는 감독님이 설명을 해주는데, 샤블리 포도를 모아서 그걸 다른 방식으로 주조한 거라고 한다. 그렇게 한 포도주라고 뭐라뭐라 라벨에 써있는 걸 보여주는데 폰카나 디카 같은 걸 키우지 않는 고로 열심히 듣고 당연히 다 증발해버렸다. ㅋㅋ 사실 저 포도주 이름을 내가 기억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묵직하고 충격적인 바디의 샤블리가 아니었으면 맛있네~ 그러고 잊어버렸을 듯. 바란 곳이 늘 그렇듯 별반 밝지가 않기 때문에 와인의 색깔 얘기는 별 의미가 없을 듯. 플륫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소비뇽 블랑이나 샤블리 특유의 라이트한 색깔보다는 좀 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실제 내 눈에 들어온 것보다는 바디감으로 인한 연상작용일 확률이 더 높음. 와인만 마시기에는 좀 부담이 가는 드라이한 바디였다. 치즈와 궁합은 아주 좋았고, 굴과도 잘 어울린다고 하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킹 크랩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클라이언트 회사인 이사가 빌라 안티노리의 2003년산 레드 와인을 이어서 시켰는데 디캔팅을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살짝, 거슬리지 않고 달아지는 느낌이 괜찮았음. 얘는 제대로 라벨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음이라기 보다는 그냥 마셨다는 기록이 되겠다.
내 돈 내고는 그런 곳에서 그런 와인들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얻어먹으면서 구경하는 건 즐겁다. ^^ 무엇보다 2시간 정도 가볍게 즐기다 서로 질질 붙잡지 않고 가뿐하게 헤어지는 센스는 최고~ 3차, 4차, 끝도 없이 마시고 죽기 위한 술자리는 정말 싫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