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사려고 벼뤘는데 마침 민음사 책들 30% 세일전을 하기에 여름 휴가를 위해 내가 나한테 선물한 책이다. ^^ 지난 주말에 거의 폐인 모드로 5권 완파.
완역본을 읽을 때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역시 축약이나 생략되지 않은 덩어리를 온전하게 읽는 건 즐겁다. 물론 내가 공력이 있어서 원서로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언감생심이니 이 정도라도 만족. 아주 행복한 책읽기였다는 감상으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삼총사, 철가면 등 내 어린 시절을 두근거리게 했던 소설들의 원작자 뒤마.
5권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200년 전에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플롯을 담고 있다. 지금도 가장 매력적인 소재인 복수를 테마로 행복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던 에드몽 단테스라는 젊은 선원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행운과 운명의 도움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복수를 펼쳐나가는 내용인데 뻔히 알고 있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두근두근하면서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넘친다. 어느 정도는 우연의 남발이 있긴 하지만 그게 전혀 거슬리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역사와 허구의 절묘한 조화. 역사가 단순히 멋지게 보이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들과 함께 생생하게 살아있고 또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당시에 이 소설은 대중소설이었겠지만 역사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모범답안을 현대에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하나 살아있는 캐릭터들. 뻑하면 명예 어쩌고 하면서 자살하려는 남자들과 당글라르의 딸인 유제니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남자에 목 매면서 의존적이고 터무니없이 연약한 여자들이 거슬리긴 하지만 당시 시대상이 그런 모양이려니 하면서 그 부분만 접어두고 본다면 다채로운 캐릭터들에게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와 그를 둘러싼 악역 조연들은 물론이고 스쳐 지나가는 단역들까지 필요없는 인물이 하나도 없고 또 그 각각의 인물들이 다 자기 역할과 성격을 뚜렷이 갖고 있다. 연재 소설이었다는데 그 급박한 연재의 와중에 어떻게 이런 개성 부여가 가능했는지... 존경스러울 따름.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내용을 형편없이 깎아먹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번역. -_-;;; 영어권 서적은 최근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프랑스어는 제대로 된 번역자가 없는지 솔직히 수준이하였다. 이런 방대한 분량의 번역은 통상적으로 여러명의 초벌 번역자가 붙고 책에 이름이 나가는 대표번역자는 그걸 정리하고 감수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대표번역자는 그 역할을 절대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이건 교정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인데 일단 같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도량형이나 화폐단위가 통일이 되어있지 않음. 그리고 어떤 권에서는 (1권으로 기억됨) 그나마도 헷갈렸는지 아니면 책임을 우아하게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몇백만 정도일 거야' 이런 식으로 생략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많았던 건 3권으로 기억되는데 여기는 조사가 수시로 틀리는 건 애교였다. '전'으로 써야할 걸 '후'로 한다거나 하는 시점의 혼란에다 온갖 오류까지 겹치는 재앙 수준. 내가 스스로 교정을 하면서 읽어야 했다.
두어 달 정도 돌리고 대여점에서조차 사라지는 책을 찍어내는 허접한 출판사도 아니고 '민음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이랬다는 게 실망스럽다. 다음에 완역본을 낼 때는 최소한 원작을 훼손하는 이런 무성의는 없으면 좋겠다.
지금에야 두고두고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지만 당대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최인호 작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뒤마인데... 몬테크리스토백작을 보면서 그가 절대적인 해피엔드 신봉자라는 생각을 했다.
단테스가 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복수를 했다면 복수를 당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또 비슷한 복수를 그에게 해야 정상인데 그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않는다.
페르낭의 아들 알베르는 오히려 아버지를 버리고 군인이 되어 떠났고, 당글라르의 딸 유제니 역시 아버지의 불행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이 자기 인생을 살러 떠났음. 빌포르의 딸 발랑틴은 백작의 은헤를 입고 또 그의 절대적인 신봉자인 막시밀리앙과 결혼. 발랑틴의 성격을 볼 때 복수의 가능성은 제로. 그녀의 의붓동생은 그 모친이 직접 동반자살을 시켜주면서 또 다른 화근도 완벽 제거. 마지막 한명이 카드루스는 무자식.
복수를 주제로 하는 내용은 하다 마는 게 제일 짜증나고 또 괜히 밤길 가기 두렵게 만드는 그런 찝찝한 결말도 사양인데 이렇게 화끈하게 끝을 내줘서 정말 만족. 완벽하게 복수를 끝낸 단테스의 나머지 인생이 구름 한점없이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은 걸 보면서 "아저씨 멋져요~'를 외쳐줬다.
책/픽션
몬테크리스토 백작
알렉상드르 뒤마 | 민음사 | 2007.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