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요 며칠 사이처럼 뺑이를 치고 날마다 마감을 막고 있으면 감상미고 뭐고 그냥 팍 엎어질텐데 간단한 감상이라도 남겨야한다는 의지가 작용. 아직은 유럽에서 충전된 배터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길게 쓸 여력은 전혀 없으니 아주아주 간단한 감상만.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안무작은 이번에 세번째.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공연은 두번째이고 베르니스의 공연을 보는 것도 세번째다.
이제 마이요 안무작은 마이요표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가늠이 되면서도 매번 그 재기발랄함과 참신함에 감탄을 하게 함. 참 진부할 수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갖고 어쩌면 그렇게 독특한 해석을 해놨는지. 어두울 수도 있는 해석은 키치한 의상과 재기발랄하고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결코 작품흐름에서 튀지 않는- 무대장치 덕분에 중화되면서 아주 즐겁게 몰입 가능한 시간이었다. 비록 수정이지만 오늘 자그마치 4개의 마감이 기다리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제 공연보는데는 거의 지장이 없었을 정도로.
스토리는 전통적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 동화의 조금 성인 버젼. 보통 아이들용 동화에서는 생략되던 왕자의 식인종족 출신의 어머니가 여기선 등장한다. 마이요의 특징은 원전의 완전 해체와 재조합이 아니라 기존 스토리의 이면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해 독특한 재해석을 가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번 라 벨르를 보면서 내내 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사랑 그 자체로, 로미오를 사랑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로, 또 마담 캐플릿과 로렌스 사제에게 독특한 의미를 부여해 네명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신데렐라에서는 죽은 어머니를 등장시켜 신데렐라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었다.
이번에는 왕자의 어머니가 오히려 왕자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갖고 작품에 등장하는데 그 카리스마라니. 안무 자체도 비중이 컸지만 이 역할은 기외땅 몰로띠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가 않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정말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듯. 베르니스나 크리스 카리스마에서는 절대 밀리는 무용수들이 아님에도 기외땅과 함께 섰을 때는 시선이 그에게로 가버린다. 이건 나 혼자 뿐 아니라 동행자들 모두 동의한 사항.
삼성에서 어쩌고 한 이후 요즘 모든 조직과 분야에서 창의력, 천재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전원이 창의력 넘치는 천재로 모인 그 조직이 꽤나 잘 굴러가겠다~'라고 비웃어주는 입장이지만 예술만큼은 창의력 넘치는 천재가 많은 수록 좋고 아무리 많아도 소화가 가능할 것 같다.
열심히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국내 발레단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입장이긴 하지만 너무 차이가 난다는 아쉬움이... 안무와 작곡과 같은 거의 순수한 창작 작업은 역시 천재들의 영역인 모양이다.
앞으로 가능한 오랫동안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이런 참신함과 잘 농익은 구성력이 조화된 작품을 쏟아내기를.
곱고 환상적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 동화가 올가미보다 더 무서운 시어머니의 존재를 알고 좀 무서워졌다면 이번에는 거기에 잘 보살핌받고 보호받던 존재였던 공주가 남성성의 폭력 앞에 노출되고 그 충격으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런 설정과 해석이 들어간다.
상징적이지만 워낙에 잘 짜인 안무다보니 그 충격이 객석에 잘 전달이 되어 오는데... 성인인 나로선 충분히 감상이 가능하지만 관객의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애들에게 보여주기는 좀 거시기 했다. 얘네들이 과연 이해를 할까 싶기도 하고 이해를 한다면 더 민망할듯. 그리고 재미도 엄청 없었을 것이다.
서막을 잘라내고 짧게 재안무를 하지 않는 이상 오리지널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애들이나 발레 초보가 첫 작품으로 만나기에는 만만찮은 길이인데 이런 현대적인 재해석판을 애들에게 보이다니.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해석한 거라는 정보만 듣고 애들을 데리고온 듯 한데... 좀 미안스런 얘기지만 무식한 부모 덕분에 애들이 고생을 좀 했겠다는 생각을. -_-; 하긴 부모도 함께 보면서 민망하긴 했을 것 같다.
발레를 보러 가면 오케스트라 때문에 몰입을 깨거나 심한 경우에는 완전히 열받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게 몬테카를로 오케스트라에다 엘리야후 인발까지 오시는 이런 초호화 서비스라니!!! 아주 감동이었다. 음악 때문에 신경을 거스르기는커녕... 착착 맞아떨어지는 음악에 완전 감동.
이런 오케스트라로 신데렐라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반주했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잠시 했었다. 차이코프스키 선생에게 아무 유감이 없으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래도 심하게 망하는 경우가 없지만 프로코피에프 선생의 발레를 반주할 때 한국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은 좀... ^^;
생각지도 않는 호강에 아주 기분이 좋았음.
9월 29일날 로얄 오페라단의 타우리데의 이피게니아부터 시작해서 어제까지 내 눈과 귀가 아주 호강하는 주간인듯. 이번 토요일에 볼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런 감동의 행렬읠 종결짓지는 않아야 할텐데.
본래 아주 짧게 쓰려고 했는데 별로 돈이 되진 않지만 오로지 친분때문에 맡은 내일 마감이 날아간 덕분에 갑자기 자유~ ㅇㅎㅎㅎㅎ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