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에 볼쇼이의 스팔타커스를 봤으니 13년만인가? 그때의 감동과 환상이었던 인상을 팍 구겨놓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그때 스팔타커스 보고 나오면서 오늘 이 공연 안본 사람들은 땅을 쳐야해~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군무와 네명 주연 무용수들의 개성이 딱딱 맞물려져서 모두들 머리속에 그리는 스팔타커스를 그대로 보여줬다고 해야할 듯.
지젤에서... 모님의 표현을 빌리면 핸드폰 64화음 벨소리보다 못한 코심 사운드 때문에 이 일을 어쩌나 걱정을 엄청 했는데 지젤을 포기하고 스팔타커스 연습에 올인을 했던 모양이다. 조금만 더 세게 받쳐주지, 치고 올라가지 하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 음악 때문에 춤에 몰입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 느낌을 제대로 내는군~ 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었음.
가장 걱정했던 음악이 대충 받쳐주니까 춤은 말 그대로 몰입과 거의 황홀경.
첫 시작에서 로마 군단의 군무. 일사불란에 힘이 넘치는 파워. 멋졌다. 그러나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고 힘에 꽉 눌리는 듯한 충격은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첫 내한 공연 때는 1층 앞쪽에서 봤으니까 그때 받았던 그 엄청난 에너지 파동을 이번 자리에서 느끼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겠지. 공연이랑 별 관계없는 얘기인데... 그때 만나던 사람이 당시 1층에 엄청 좋은 자리를 사서 보여줬음. 아마 내 돈 주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은 로또 당첨되지 않는 한 힘들듯.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데 스팔타커스 볼 때는 그 사람 생각이 꼭 난다. 그 비싼 공연 보고 나서 바로 찼다는 죄책감이 약간은 작용하지 않을까? ㅎㅎ;;; 아마 스팔타커스 볼 때마다 생각날듯.
그리고 처음과 두번째라는 차이도 있었을 것 같다고... 스스로 변명해줬음. ㅎㅎ;;; 일단 마음에 들면 사람이란 존재는 자꾸 시키지도 않은 변명까지 나서서 해준다.
스팔타커스를 맡은 무용수는 드미트리 벨로골롭체프. 이 아저씨가 스팔타커스를 잘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크게 걱정없이 갔고 역시 명불허전.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깝게 느껴지던 이렉 무하메도프의 야성적인 전사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벨로골롭스키가 연출하는 선이 굵은 비장미와 그걸 받쳐주는 탄력에 환성이 절로 나왔다. 그 엄청난 그랑제떼들의 연속에도 3막까지 높이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체력에도 감탄.
1막 초반부에는 쇠사슬에, 2막 초반부에는 붉은 망또, 3막에서는 칼을 들고 춤추는 스팔타커스의 모놀로그. 그동안 영상물을 숱하게 보고 스팔타커스 공연을 두번이나 봤으면서도 그 장치에 대해 한번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 연결성과 의미가 내 나름대로 정리가 된다. 그런 상징을 만들어 배치한 그리가로비치의 능력과 그것을 춤으로 전달해준 벨로~ 아저씨에게 다시 한번 감탄.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다시 욕하는 것 같은데... 2막이나 3막에서 반주가 조금만 더 감정선을 따라 고조를 시켜줬다면 좀 더 감동했을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볼쇼이 오케스트라였다면... 작년 키로프처럼 오케스트라를 데려왔더라면... 아쉬웠음.
92년에는 무뎌진 지금보다 음악에 더 까탈스러울 땐데 음악에 대한 불평의 기억이 없는걸 보면 그때는 볼쇼이 오케스트라가 왔었나?
스팔타커스와 대척점에 있는 악역 크라수스, 블라디미르 네포로지니. 작년에 한국에 왔을 때 못한다고 욕을 엄청 했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지만 작년에 왔던 허접한 주연들 중 하나였던 기억이 가물가물. 그러나 만약 욕을 했더라도 오늘 크라수스로 다 취소다. ^^
어쩌면 그렇게 몸이 좋고 다리가 기신지. 바라만 봐도 즐거운 판에 춤까지 잘 춰주니 침이 질질. ㅎㅎ;;; 크라수스의 비열함에 치를 떨면서 스팔타커스에게 감정 이입을 해야 하는데 너무 멋있다보니 그냥 아저씨가 이겨도 될 것 같네요~ 의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것을 안다는 건 즐거운 공연 관람에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시저의 고모부인 50대의 크라수스 이미지가 떠올라 그걸 지우느라 고생 좀 했음. ^^ 다행히 네페로지니 오빠(?)의 빼어난 몸매가 모든 것을 잊게 해줬다.
비겁하고 권력 지향적인 남자가 아니라 스팔타커스가 봉기해야할 당위성이 있듯 크라수스도 자기 나라와 자신을 지켜야하는 쪽으로 역할의 해석을 그렇게 한 것 같다는 느낌.
프리기아 역은 안나 안토니체바. 어제 지젤 공연을 보고 온 모님이 지젤이 너무 꽝이라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못하는지 신경을 쓸 수 조차 없었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녀도 어제 힘을 아껴서 오늘 올인 했는지 못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몸의 라인과 움직임이 어쩌면 저렇게 처연할까 감탄. 특히 스팔타커스와 떨어지고 땅에 엎드린 모습은 휘유~ 감탄이 나올 정도의 선. 그러나 안무 자체가 좀 그렇기도 하지만 아에기나보다 조금 존재감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가슴을 치는 강렬함은 없었다. 비장미로 충분히 치고 들어올 수 있는데 곱다, 처량하다 그 정도. 레퀴엠에서도 그 비탄에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음.
그러나 해설 발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2인무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이 아닌 것만 해도 어딘지. 물 흐르듯 연결되는 리프트를 보면서 눈을 씼었다. ㅎㅎ;;;
아에기나 역의 갈리나 스테파넨코. 작년에 그녀에게 너무나 학을 떼서 그라체바 대신 스테파넨코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솔직히 으악! 했다. 그라체바 대신 룬키나는 못 보낼 망정 스테파넨코라니 망했다가 나의 예비 결론이었음. 그리고 지젤에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춤을 보여줬다는 소문이 들려와 오늘 아에기나는 포기하고 봤는데 허접 스테파넨코의 인상을 오늘 날렸다.
이런 분위기 ->
어쩌면 그렇게 요염하고 표독스러운지. 권력지향적인 팜므 파탈 아에기나를 제대로 보여줬다. 너무나 존재감이 커서 오히려 프리기아의 그림자를 흐릿하게 했을 정도. 역시 볼쇼이의 프린시펄은 다르구나 생각했다.
내일 한번 더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다~ ^^ 거의 듣도보도 못한 이름인 스팔타커스와 프리기아 보다는 크라수스와 아에기나에게 기대감이 더 가긴 하지만 또 생각지도 않게 잘 할 수도 있겠지~ 기대감 폴폴~
수정 70페이지 정도 남았다. 마감을 어기지 않아도 되겠군. 일단 내가 한 약속은 지키고 그 다음에...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