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개관한 성남 아트센터로의 초행길이었다. 아마 몬테카를로 발레단이란 엄청난 당근이 아니었다면 절대 갈 일이 없었을 그리고 이 정도 큰 껀수나 돈벌이가 아니면 절대 갈 일이 없을 머나먼 분당까지의 길.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홈페이지에 올려진 길찾기 안내도 자세했고 또 이정표에서 성남아트센터 가는 길이 잘 표시되어 있어 그것만 챙겨도 대충 길을 잃지않고 찾아갈 수 있다.
외경이며 주변 조경도 잘 되어 있고 주차장도 한산하고 넓어서 더구나 공짜 일단 아트 센터의 첫 인상은 참 좋았다.
막힐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출발한 덕분에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해서 저녁 먹을 걱정을 했는데 지하에 있는 카페테리아도 바가지 씌우는 일 없이 가격 대비 훌륭한 맛과 분위기였다.
거기다 덤으로 마침 저녁인지 대충 참인지를 먹고 있는 마이요 등등 무용수로 짐작되는 몇몇을 봤다는 것도 뜻밖의 횡재. ^^ 사인 받고 사진 찍고 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눈으로 봤다는데 만족하고 배를 채우는데 몰두한 뒤 표를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앉을 곳이 형편없이 부족해 고생시키는 여타 연주홀과 달리 거의 어지간한 호텔 수준의 휴식 공간을 갖춘 로비도 정말 훌륭하단 얘기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만족감을 갖고 자리에 앉았을 때 좌석간 간격이 넓은 것에도 일단 만족. 그런데 줄간 높이가 좀 낮은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 그래도 이렇게 신경써서 지은 홀인데 설마 관람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했겠냐. 어련히 알아서 잘 했겠지 믿고 공연을 기다리는데, 어라! 앞에 사람이 앉으니 절대 큰바위 얼굴도 아닌 정말로 일반적인 사이즈 무대가 떡하니 가린다.
그러고보니 좌석이 엇갈리게가 아니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이었음에도 무대와 좌석간의 거리감이 거의 다른 공연장 3층에 앉은 느낌을 육박한다.
성남아트센터를 설계한 사람은 공연장 로비와 외경 구경은 많이 했을지 몰라도 실제로 앉아서 공연을 본적은 없는 사람임을 확신했다. 단 한번이라도 공연장에서 공연을 봤다면 절대로 이런 초보적인 배치는 하지 않는다. 설계자가 누군지, 그리고 이걸 그대로 오케이 한 감리자가 누군지 정말로 보고 싶었음. 이렇게 돈으로 바른 건물의 용도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
일단 여기서 기분을 좀 잡쳤으나 그래도 기대하던 베르니스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시 불길한 예감 엄습.
분명 이런 공연은 초등학교 1학년 이상만 출입이 가능한데 내 앞줄에만 해도 분명한 미취학 아동 2명이 각기 다른 가족과 함께 등장. 여기는 그런 관리가 절대 안됨을 확인. 그래도 절대 통제 안되는 남자아이들이 아닌 것만도 감사하면서 앞 자리의 머리들을 피해 어찌어찌 시야를 확보해 공연을 보려는데 이제 1막이 거의 끝날 때까지도 늦게 온 관객들의 입장이 계속된다.
내가 저 사람들의 왔다갔다 하는 머리통을 보려고 돈을 내고 이 먼 경기도까지 토요일에 오지는 않았는데. 열이 팍팍 받기 시작. 이쯤되면 조르주 동이 부활해 볼레로를 춤춰주지 않는 이상 집중도 바닥이 된다. -_-;;; 그리고 좀 미안한 얘기지만 오늘 왕자님은 절대 조르주 동은 아니다. 신데렐라도 플레세츠카야나 삐에뜨라 갈라가 아니다.
결국 1막은 열나는 걸 참느라 떠나기 직전에 본 스팔타커스처럼 거의 집중하지 못한 무대. 늦게 들어오는 관객들 때문에 열내면서 내가 정말 한국에 돌아왔구나를 실감했다면 너무 서글픈 일일까?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고... 진짜 중요한 공연 얘기를 하자면...
재미있고 재기발랄했다. 포킨느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페트루슈카, 그리고 마츠 에크의 영향을 어딘지 모르게 받은 것 같다. 신데렐라와 왕자보다는 죽은 엄마와 아버지가 주인공인 것 같다.
이렇게 요약이 될 듯.
몇년 전(2년 전인지 3년전인지 헷갈림. ㅠ.ㅠ) 로미오와 줄리엣 때 엄청난 카리스마로 주변 무용수들을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게 했던 베르니스는 이번에도 존재감을 엄청나게 발휘했다. 마이요가 베르니스를 위해 로&줄을 안무했다는데 이 죽은 엄마(=요정대모)도 베르니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면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로 집중이 된다. 국립의 공연 때는 혼자 너무 키가 커서 그런가 했는데 몬테카를로 발레단에선 신장이 그렇게 독보적으로 우뚝 솟아 있지 않음에도 시선 집중. 여자 무용수로선 정말로 흔치않은 존재감인데... 굳이 비슷한 타이프를 찾자면 실비 기엠과 플리세츠카야 정도의 카리스마랄까?
흔히 무용수들이 키가 너무 크면 유연성이 떨어지거나 자기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너무나 많은 기대를 갖게 했으나 안타깝게도 신체 컨트롤이 절대 늘지 않는 국립의 정모씨. ㅠ.ㅠ) 얼마전 왔던 우바로프처럼 몸이 너무 자유자재로 움직이니 엄청난 신장이 오히려 비할데없는 장점이 된다.
신데렐라의 아버지 크리스 로엘랑 역시 베르니스와 딱 맞는 몸사이즈(^^;;;)로 밀리지 않는 모습. 우유부단한 듯 하면서 비탄에 잠긴 아버지 역할을 거의 완벽히 소화.
이 작품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부모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두 사람이 동선을 자꾸 따라갔다.
신데렐라는 오렐리아 샤페르(? 인 것 같음. 불어 발음은 너무 어렵다.)는 유일하게 토슈즈를 신지 않고 나온 발레리나. 신데렐라의 자아와 자유의 상징이 맨발이라고 마이요가 설정을 했다고 하는데 토슈즈를 신지 않았을 뿐 너무나 완벽한 발끝의 라인과 환상적으로 휘어진 고는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다리부터 발끝의 곡선이 예술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존의 구박받고, 슬퍼하다 요정 대모의 도움과 왕자와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기존의 신데렐라와 달리 그녀는 반항도 하고 화를 내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니다. 더구나 그녀 혼자 토슈즈를 신지 않기 때문에 동작 자체에서도 많은 구별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설정된 나름대로의 차별성과 역할 부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존재감이 별로 크지 않았다. 이건 그녀의 해석이나 춤의 문제인지 아니면 안무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데렐라에 집중이 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나 혼자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왜 자꾸 마츠 에크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떠오르는지. -_-;;; 나중에 에크의 잠공주를 보면서 한번 연구를 좀 해봐야겠음.
왕자인 아시에르 우리아게레카. 대부분의 신데렐라 안무가 그렇듯 왕자는 양념보다 조금 더 비중있는 역할. ^^;;; 기존의 왕자들처럼 구원자나 노블한 존재가 아니라 성깔도 있고 뭔가 권태에 몸부림치는 입체적인 성격은 재밌었지만 더 이상의 깊이나 생각할 여지는 별로 없었던 듯.
능청스럽고 맛깔스런 춤을 보여주긴 했다. 그러나... 당신 역시 당신 파트너처럼 신데렐라 아버지에게 밀렸음.
신데렐라의 새어머니와 의붓자매들을 보면서는... 내가 이 발레의 안무가를 사전에 몰랐다고 해도 마이요 것이라고 충분히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정 중앙의 꼭지점을 놓고 양쪽의 무용수가 움직이는 구도. 그 삼각형을 이루는 각도와 구조는 로&줄에서 신부와 그의 두 복사들의 모습과 많이 흡사했다.
이때는 확연히 드러나는 삼각형이었지만 여하튼 마이요는 3-5-7로 이어지는 홀수 숫자로 이뤄진 각도의 움직임을 좋아하는 듯. 3인무, 5인무, 7인무의 연결과 움직임이 눈에 확확 들어오고 재미가 있었다.
별로 공연 자체와 관계없는 얘기인데... ^^;;; 계모와 의붓언니들 의상을 보면서 어릴 때 봤던 손오공 대전비인이던가?이란 영화에서 나왔던 박쥐 마왕의 모습이 떠올랐음. 그런데 동생은 뾰족하게 세운 머리에서 디즈니 만화 잠공주의 마녀 캐릭터를 연상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할 얘기는 미술.
미니멀리즘에 가까우면서도 현실성을 잃지않고 구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무대미술을 보며 감탄 또 감탄.
아무렇게나 세워놓은 것 같은 하얀 벽은 사실 완벽하게 계산된 동선이고 특히 2막에 등장한 그 계단. 한쪽 라인은 계단으로 다른쪽 라인은 미끄럼틀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만들어놔서 같은 장치를 놓고도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디자인이 되어있다.
↑ 이 계단
3막에서 천과 그 하얀 벽 몇개로 순식간에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만드는 아이디어는 감탄과 함께 웃음. ^0^ 이런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과 일한다는 건 안무가로서 엄청난 재산이고 복이란 생각도 했다.
공연에 늦고 어린 애들이 떠드는 걸로도 모자라 사탕 까먹느라 부스럭거리기까지 했지만 이 정도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줬기에 오늘의 대차대조표는 이익이 난 것으로 정산.
갈때는 혹시 늦을까봐 2시간 전에 출발한 보람도 없이 30분만에 도착했는데 반대로 집에 올 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귀가. ㅠ.ㅠ 작년 요맘 때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 공연보고 나오다가도 불꽃축제 때문에 강변 막혀서 엄청 고생했는데 1년 사이에 또 다 까먹었음.
불꽃축제 너무 싫다. 여의도 사는 애들이 벚꽃축제를 저주하는 기분을 알겠음. 다행히 오늘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