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공을 또 보고 왔다.
난 평일에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지만 일요일과 공휴일에 움직이는 건 더 싫어한다. 왜 일요일에 예매를 했을까 어제 밤과 낮에는 살짝꿍 후회하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으면 가슴이 아팠을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보면서 왜 첫날 황혜민+엄재용 커플에서 2003년 김세연 +엄재용 조합과 같은 충만감과 짜릿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확연히 와닿았다.
황혜민씨와 엄재용씨는... 각자 놓고 보면 나름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있는 재료 ? ^^ 달리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비유로지만 함께 썼을 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색깔로 표현하자만 엄재용씨는 강렬한 원색의 유화 물감, 황혜민씨는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수채화나 파스텔 물감 같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둘이 같은 무대에 서면 황혜민씨가 늘 엄재용씨의 색깔에 눌려 버리고... 보는 입장에선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거겠지.
남녀 무용수의 색깔이나 에너지가 동등하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차라리 여자쪽이 강한 편이 발레에선 더 나은 것 같다.
여하튼 그동안은 왜 엄재용씨와 황혜민씨 커플은 늘 저럴까, 이상하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오늘 이원국+ 임혜경씨 공연을 보면서 느꼈다.
첫날 공연은 1막 마지막의 광란의 장면을 제외하고 사실 대부분의 시선이 엄재용씨에게 집중되는 무대. 이 표현을 첫날 떠올렸다면 아마 그날 감상문에 이렇게 썼을 것 같다. '오늘 발레의 제목은 지젤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였다라고.'
철딱서니없이 일을 치고 어쩔줄 몰라하며 수습을 못해 동동거리는 알브레히트. 어찌보면 나이는 좀 더 먹었을지 몰라도 알브레히트도 정신 연령은 지젤과 비슷한 16살 정도의 소년이었고 황혜민씨의 지젤은 안아주고 싶도록 청순하고 가련한 어린 소녀.
사실 둘 다 1막에선 죽을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지젤의 죽음 뒤 무덤에서 윌리들의 위협을 피하던 그 밤에 지젤도 알브레히트도 사랑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리고 바로 영원한 이별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첫날 공연만을 봤다면 못했을 것 같다. 오늘 확연히 다른 해석을 한 이+임 커플의 지젤과 알브레히트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첫날과 계속 비교를 하게 되고 이런 해석에 대한 생각이 가지를 자꾸 뻗었다.
오늘 이원국+임혜경 (존칭 생략. 딴지 사절) 커플은 소녀와 소년의 철부지 사랑이었던 엄+황의 오프닝과 달리 어른의 사랑. 황혜민의 지젤이 막 사춘기를 벗어나 사랑이란 것에 설레는 소녀라면 임혜경의 지젤은 농익은 처녀를 표현하고 있다.
가벼움을 지젤의 이상으로 두고 있다면 임혜경의 지젤은 분명 황혜민보다 무겁다. 하지만 드라마나 표현력에 있어서는 확실히 한 수 위.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감정과 뉘앙스가 마임이나 동작에서 확실하게 전달이 된다. 신체조건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적인 부분에서 세심한 계산과 움직임만큼은 이제 확실한 수준에 도달한 느낌. 집중하려는 큰 노력없이도 지젤과 알브레히트에게 몰입이 잘 된다.
1막의 하일라이트인 광란 장면에서 황혜민의 지젤은 확실한 미친x. 히스테릭한 경련과 신경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마구마구 표출됐었다. 그런데 임혜경의 지젤은 그렇게까지 완전히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믿지 못하고 믿고 싶지 않은 처절함이 강했고 칼을 들고 설칠 때는 '확 죽어버려서 저 놈에게 복수나 해버릴까'하는 원한도 은근슬쩍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건 내 느낌이다. ^^
1막에 대단한 춤은 없지만 임혜경씨의 연기와 해석만큼 이원국 역시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한다. 농익은 처녀를 유혹하러 온 백작은 놀아볼 만큼 놀아본 바람둥이의 분위기가 가득. ^^; 지젤을 좋아하긴 하지만 탈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즐기려는 의도가 내 눈에는 농후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탄로난 위기의 순간에 확연히 차이가 난다. 윌프레드 옆에서 "어쩌지? 어쩌지? 큰일났네." 하고 동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엄재용의 철부지 알브레히트와 달리 이원국의 알브레히트는 미안해 하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달래려고도 나서보고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는 침착함이 보였다.
'역시 선수는 연륜이 필요해~'라는 생각을 혼자 하며 웃었음.
그런데 오프닝에선 지젤에게 달려드는 알브레히트를 지젤 엄마가 확 밀쳐버렸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깊고 설득력있었다 오늘은 없었다. 일부러 뺀건가? 궁금.
패전트 파드데는 여전히 별로였지만 듀엣 부분은 첫날보다 타이밍이 훨씬 좋아졌지만 각각의 바리에이션은... 오늘은 진헌재씨마저 배신했다. ㅠ.ㅠ 군무는 오프닝에 비해 훨씬 손발이 딱딱 맞고 좋았음.
힐라리온은 오프닝의 연기와 긴장감이 더 나았던듯. 그날은 눈이 자꾸 가고 한 축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은 좀 희미했다.
보통 1막은 2막을 기다리며 대충 보는데 오늘은 무용수의 해석을 직접 느끼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준 공연이었다. 1막에서 이 정도 만족감을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다시 한번 패전트 파드데에 아쉬움을 표하며 1막은 이만 총총.
2막은 미르타에게 다시 박수.
이성아씨의 빠 드 부레는 정말 예술이다. 예전에 문단장 현역 시절에 그녀의 빠드부레를 볼 때마다 저건 발끝에 바퀴를 달지 않고는 불가능이야라고 감탄했는데 그 부드러움을 여기서 다시 발견. 전체적인 분위기나 춤이 워낙에 좋다보니 내가 미르타에게 주구장창 원하는 사악함과 카리스마 부족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이런 해석도 가능해~ 모두 다 똑같을 필요는 없지.' 이러면서 혼자 변명을 다 해주고 있음. ^^;;; 첫날과 같은 멤버인 리드 윌리 두 사람도 역시나 환상~ 미르타와 리드 윌리들이 분위기를 못잡아주면 2막 들어올 때 김이 팍 새는 느낌인데 오늘도 여기서 기분이 완전히 업업업~
비노그라도프가 이번 지젤에선 주연 무용수들에 따라 안무와 템포 설정을 다 각기 해준 것 같다. 알브레히트와 지젤이 등장하는 부분의 템포가 첫날에 비해 상당히 느린 느낌. 저런 템포로 아다지오를 과연?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약간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체로 훌륭.
사실 오늘 2막이 콩쿨이었다면 심사위원 입장에서 점수 주기가 참 곤란했을 것 같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잔 실수들이 꽤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오잉?' 하다가 '우와~' 하다가. 상반된 감탄사의 반복. ^^;;;
1막에서도 같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임혜경씨는 황혜민씨만큼 한들한들 날리는 느낌은 없다. 그런데 2막에서는 그다지 가볍지 않은 그녀가 이상하게 더 유령같아 보인다고 해야하나... 특히 연속 소떼에서는 잠깐씩 공중에 걸려있는 느낌까지. 높이가 높아서 그런지 간만에 충분한 체공시간을 갖고 공중에 떠있는 소떼를 봤다.
한국 무용수의 공연에서 해석을 갖고 얘기를 하게 되니 이게 얼마만인지. -_-;;; 흥분되서 자꾸 얘기가 길어지는데 임혜경의 지젤은 1막에서 이미 알브레히트를 충분히 사랑했고 그래서 죽은 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완성된 사랑을 갖고 알브레히트를 보호하고 그를 지킨다. 육신은 죽었고 윌리가 되었지만 영혼은 아직도 따뜻한 인간인 느낌. 발레의 설정상으론 알브레히트보다 어린 처녀지만 그녀의 해석은 연인인 동시에 모성까지 지닌 이상의 여인이다.
투명하면서도 따뜻한 아우라가 묻어나는 느낌. 내가 가장 이상적인 지젤로 꼽는 메첸체바의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아마 더 호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원국의 알브레히트. 솔직히 1막이야 연기와 분위기로 대충 먹는다고 쳐도 2막은 어쩌나 걱정을 좀 한 것은 사실이었다. 재작년의 잠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공연부터 올 봄 돈키호테까지 이원국씨는 파트너쉽에선 뛰어났지만 솔로 바리에이션에선 아쉬움을 많이 줬다. 첫날 엄재용의 그 눈이 휙휙 돌아가는 엄청난 연속 앙트르샤에 중독이 됐는데 단점만 보이면 어쩌나 걱정한 것은 기우.
정말로 오랜만에 전성기 때 이원국의 모습을 다시 봤다. 그 높이에다가 음악과 착착 맞아떨어지는 완급 조절. 자유자재로 늦췄다 당겼다 하는 삐루엣과 제떼는 그의 전성기 때 전매특허였는데 오늘 2막 바리에이션에서 유감없이 보여줬다. 발레리나들이 가장 열받는게 발레리노보다 박수를 덜 받는 거라고 하는데 이 바리에이션 끝나고는 한참이나 다들 미친듯이 박수. ㅎㅎ
사실 임혜경씨가 조금만 덜 잘 했으면 오늘 공연도 지젤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일뻔 했음.
↑ 이 아주머니. 누가 애 딸린 30대 중반 아줌마로 보겠냐. ㅠ.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부분도 정말 절절했고... 단순히 춤만 추는게 아니라 춤을 통해 얘기를 확실히 전달해 줬다. 춤을 잘 추는 공연은 많이 봤지만 얘기가 확실히 들리는 공연은 그다지 많이 보지 못한 관계로 자꾸 그게 강조가 됨.
여기서 잠시 오케스트라도 칭찬. 무용수에 맞춰서 그렇게 템포와 타이밍을 맞춰주다니. 놀랬음. 한국 오케스트라도 하면 안될 것도 없는데... 전속 반주단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잘 해도 필요하다고 하고 못해도 필요다하고 하고. ㅎㅎ)
엄재용씨가 앙트르샤로 완전히 덮었던 부분은 예전에 마카로바와 바리시니코프 실황에서 봤던 바리세이션으로 안무되어 있었다.
다른 공연은 못봤지만 아마 비노그라도프가 이 바리에이션을 알브레히트에게 각각 따로 안무해줬지 싶음. 능력있는 안무가를 가진 단체의 장점이겠지. 1막도 그렇고 2막도 그렇고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소소하게 다른 것이 꽤 있었다. 모든 공연을 다 보면서 비교해봤더라면 그것도 쏠쏠한 재미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잠시 스쳐갔다. ^^
오늘의 결론. 나랑 UBC의 지젤은 궁합이 좋나보다. ubc의 첫 지젤은 문단장의 지젤을 제외하고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니 지워버리고. 1999년인지...? 박재홍씨
내 동생은 자기 평생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지젤을 봤기 때문에 그 이하로 눈 버리고 싶지 않다고 이 공연 이후 지젤은 어느 단체가 와도 보지 않는다. 이 완벽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나 뭐라나...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좀 괴벽인 것도 같음.
2000년인가 2001년에 전은선씨의 부상으로 문단장이 급히 대역으로 올랐던 드라고스 미할차와 문단장의 지젤. 기술적 완성도는 이전 공연보다 확실히 낮았지만 그래도 그 아우라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쉽게 만나기 힘든 공연이었다. 그리고 미할차의 그 훨헐 날던 모습은 정말....
2003년에 있었던, 지금도 그 공연을 본 사람들은 다 침을 튀기는, 김세연 + 엄재용의 지젤. 이것도 다시 보기 힘든 명공연. 그날 너무나 썰렁한 객석 분위기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김세연 + 엄재용의 결합은 보기 드문 최상이었는데.
엄재용도 그렇고 황혜민도 그렇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다른 파트너를 찾으면 좋겠다. 예전부터 좀 아닌 것 같다였는데 정말 이제는 확실하게 느껴짐.
에고... 열변을 토해봤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에 지나치게 열내지 말자.
UBC공연 보러 갈 때마다 일취월장하는 엄재용씨 보는 즐거움이 요즘 정말 쏠쏠이다. 한 3년 전만 해도 상체가 딱딱하고 어깨라인은 보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어서 아쉬웠는데. 이제는 그의 그런 느낌이 없음. 그의 이런 눈부신 성장은 팬의 입장에서 정말 기쁜 일이긴 한데...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고 역시 기대되던 이원철씨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오늘 지젤을 보고 돌아오면서 쓸데없이 했다. ㅎㅎ;
내년 UBC 프로그램 중에 한여름밤의 꿈. 어떤 오베론을 보여줄지 기대 만빵~ 노이마이어 것이 죽인다는데... 스포얼리 것은 어떤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