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벤트 가든에서 아이스크림 사먹고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거기 푹신한 소파에서 이번 시즌 작품들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다 보고 입장.
대략 40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오디오 볼륨이 너무 낮아서 그림만 봤지만 볼만했다. 조안 코보그(로얄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데 요즘 안무도 시작한 모양) 등 안무가들이 자기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출연 무용수들이 또 얘기하고 등등... 오디오만 잘 들렸다면 좋았겠다는 하긴 들렸다 쳐도 잘 알아들었을지는 의문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림만 열심히 봤다. ^^
이날 공연한 작품은 애쉬튼 안무의 랑데뷰와 로얄 발레단의 프린시펄 조한 코보그가 재안무한 라 실피드.
마고트 폰테인의 다큐멘터리에서 잠깐씩 흑백화면으로만 봤던 랑데뷰를 실제 무대에서 만나니 별볼일 없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요시다 미야코의 출연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내 낮은 평가가 쬐끔 미안했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미야코는 꽤 괜찮았음.
예전에 봤던 짧은 자료화면에서 약간은 세기 초의 극장쇼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 컬러로 보는 공연에선 확실히 그런 밝고 가벼운 발랄함이 강하다. 의상과 무대의 색깔은 비비드를 넘어 거의 키치하다고 할 정도. 그럼에도 거슬리지 않는 그 컬러배치에 다시 한번 감탄.
누구는 유럽 사람들의 색감이 뛰어난 건 NTSC보다 컬러에 더 예민한 PAL 화면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어릴 때부터 너무 좋은 그림들을 많이 보고 그 영향을 받은 디자인에 둘러싸여 자라는 선순환 덕분이지 싶음.
저런 어마어마한 미술품들을 어릴 때부터 공짜로 계속 보고 자란 감각을 한두세대 안에 따라잡긴 힘들겠지. 원화가 주는 엄청난 아우라는 복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다. 한국의 디자인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컬러를 보편성으로 얼마나 승화시키느냐에 성패가 달리지 싶다는 생각을 미술관과 랑데뷰 무대를 보면서 했다.
랑데뷰란 작품 자체가 어떤 절절한 감동이나 클라이막스 보다는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로 다양한 춤을 보여주는데 있는 만큼 대단한 인상은 없었다. 그래도 손발이 딱딱 맞는 움직임은 즐거웠음. 그리고 요시다 미야코와 그녀의 파트너의 춤도 좋았다.
라 실피드는 코보그의 신안무. 12일에 런던으로 바로 왔으면 코요카루의 실피드를 볼 수 있었겠지만 사라 램의 실피드도 기대 이상이었다. 제임스나 거언, 에피까지 무용수들의 능력은 흠잡을데 없었음. 마이너 캐스팅이라고 김 빠져서 앉아 있었던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특히 마녀 마쥐역의 캐릭터 댄서의 마임과 표정연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 솔직히 로얄의 힘을 난 여기서 느꼈다.
3층에 앉았음에도 표정과 분위기가 정확하게 전달되어오고 함께 웃고 분노하도록 관객을 끌어들인다. 감탄 또 감탄.
최근에 다른 버젼의 실피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요한 코보그의 안무는 고전을 재안무하는 현대 안무가들이 늘 그렇듯 논리 전개의 구멍을 되도록 막고 극을 최대한 재미있게 끌고나가려고 노력했다.
에피의 엄마인지 유모인지 아니면 동네 아줌마인지 모호하던, 에피와 함께 있는 아줌마에게 제임스의 엄마라는 확실한 소속을 갖게 하고, 같은 무늬의 킬트로 한 집안이 되는 동질감을 형성하게 하는 등 소소한 장치들에서 굉장히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많은 장치들로 논리전개의 구멍을 막는 부분은....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지만 제임스가 정말로 싸가지 없는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주인공의 슬픔과 사랑에 별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분명 그가 주인공이고 마쥐가 악역임에도 마쥐에 대한 제임스의 행동을 보면 저 놈은 저렇게 당해도 돼! 라는 감정이 들게 됨. 그리고 내가 에피라도 거언을 택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스쳐가는 것 없이 조연들의 성격과 행동의 당위성을 확실히 부각했고 또 거언을 비롯한 남성 무용수들의 춤을 강화해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코믹한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함. 이 부분은 가장 확실하게 성공을 거뒀다.
안무가가 웃어줬으면 하고 배치한 부분에선 다들 자연스럽게 폭소가 터져나왔다. 나 역시 웃었음. ^^
2막에서도 마쥐와 마녀들의 춤을 비롯해 캐릭터 댄스의 강화가 눈에 띄었다. 하긴 실피드와 제임스의 파드데는 손을 대기가 좀 곤란한 부분이었겠지.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부분은 집중해서 봤지만 시차로 인해 2막에서 실피드와 제임스의 가장 중요한 파드데는 필름이 약간씩 끊기는 불상사가 있었다. ㅠ.ㅠ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OTL.
그래도 전체적으로 만족 + 행복.
다만 내 자리가 제일 가장자리라 휴식 시간마다 빠져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층간 높이는 이상적인데 좌석간 간격은 내 다리가 짧은 것에 감사해야했다) 매번 일어서느라 고생. 착한(?) 나와 달리 저쪽 라인의 인간들은 대충 다리만 치켜들고 알아서 빠져나가란 태도니 모든 사람들이 내쪽 라인으로 기어나온다. -_-;;; 중간 좌석까지는 이해하지만 저쪽 출구에 가까운 인간들까지 내쪽으로 줄줄이 나올 때는 한대 때려주고 싶었음.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 아파 죽겠구만.
아래층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3층엔 거의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고 비율도 그리 높지 않음. 메트나 로얄에는 한국과 반대로 나이든 관객들이 많다더니 정말인 것 같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보면서 익숙했던 이름들이 많이 사라진 것에 세월의 흐름을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린시펄과 솔리스트에 MADE IN ENGLAND 가 하나씩 보이는 걸 보면서 로얄이 얘네들을 어떻게 키워내고 밀어줄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음. 다음에 로얄 발레단 공연에 갈 일이 있으면 그 이름들을 좀 주목해 봐야겠다. 여기도 세대 교체 중에 있는 것 같다.
몇년 정도 일찍 왔으면 이렉 무하메도프를 한번쯤을 볼 수 있었을까? 그 아저씨의 춤을 좋아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전막 공연을 무대에서 보고 싶었는데. 오래 전의 그 갈라가 우리 인연(?)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일정이 안맞아 로얄 오페라단의 지그프리트를 못본 것을 다시 한번 아쉬워하며 귀가.
돌아오는 길은 본래대로라면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호텔까지 한번에 죽 오면 되는 코스였다. 그런데... 주말에 피카딜리 라인 수리 및 점검이라 운행 중단이다. -_-;;;; 피카딜리 라인이 관광지 및 공연장과 다 연결이 되어서 일부러 호텔을 그 라인에 잡았는데 낭패.
영국은 수시로 지하철 수리를 하니까 주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으면서 2번이나 갈아타고 동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