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을 기다려 예매를 했고, 그리고도 몇달을 기다려서 봤다. 첫 내한 공연의 충격과 만족감이 워낙에 컸기 때문에 이번 신작에 대한 기대감도 만빵. 하지만 돈 주앙과 몰리에르만을 놓고 얘기하라면 솔직히 실망이다.
물론 이건 에이프만에 대한 기대가 워낙 높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안무가나 기대치 0인 국내 안무가가 이 작품을 안무했다면 괜찮군, 꽤 잘 했네 정도까지 평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에이프만이라는 걸 젖혀놓고 냉정하고 봤을 때 범작이라고 감히 말한다.
일단 아이디어가 정리되지 못한 느낌.
기존의 에이프만 안무작들은 어떻게 저런 거대한 스토리를 2-3시간 짜리 발레로 뭉쳐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었다. 또 쓸데없는 군더더기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는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계속 뚝뚝 끊어진다. 몰리에르의 삶과 그가 창조한 인기있는 주인공 돈 주앙의 엽색과 파멸을 계속 교차시켜 가는 아이디어는 좋았다. 하지만 과한 욕심이었다. 차라리 돈 주앙 하나만 선택을 하던가 아니면 몰리에르를 중심에 놓고 그의 수많은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교차하는 형식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월권적 생각까지 했다.
에이프만 발레단의 공연을 보는 중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끼어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전 작품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리가 멀어서 집중도 흐려졌다고? 천만에 제일 앞에서 돈 주앙의 느끼한 시선이 꼭 내게 향하고 눈까지 맞추고 있다는 착각까지 하면서 봤다.
중간중간 재기 넘치는 에이프만만의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있었다. 지젤 패러디, 루이 14세 등의 모습에 여전히 변함없이 재기 발랄한 음악 선택. 특히 1막에서 돈 주앙의 유혹을 받는 수녀의 장면에서 사용된 아뉴스데이. 가사와 춤이 그렇게 완벽하게 조합될 수 있을까 정말 감탄을 했다.
그러나 그때뿐. 다른 늘어지고 끊어지는 부분을 광휘로 감춰줄 만큼은 아니었다. 에이프만 만큼 암전과 소품을 극적으로 이용하는 안무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너무 과용되어 좀 집중할만하면 몰입을 날려버렸다.
에이프만의 특기인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이 되는 다양한 볼거리. 이번에 놓친 장면 때문에 한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중적인 안무 구조가 가끔 눈에 띄긴 했지만 꼭 한번 더 봐야돼!!! 라는 강렬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데는 실패.
솔직히 지루했다. 1막도 2막도 오랜만의 문화생활이라는 의지 + 신의 불공평함을 원망하게 하는 무용수들의 완벽한 몸매와 춤으로 버텨냈다고 하면 되겠음.
마무리 엔딩도... 뭐랄까.... 너무 질질 끌었다. 몰리에르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끝을 냈다면 좀 더 많은 여운이나 감동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마땅한 당위성이나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에필로그성 안무가 두개나 들어가는 바람에 빨리 끝나면 좋겠다고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에이프만은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소재에 특기를 보이지만 코믹한 것에도 분명 재능이 있다. 그건 그의 초기작인 피가로의 결혼을 보면 정말 극적으로 드러난다. 내 생애에 그렇게 에로틱하면서도 재기발랄하고 웃음이 폴폴 나오는 발레는 보지 못했다. 정말 성인을 위한 하이 블랙 코메디의 진수라고나 할까.... 이번 작품은 차라리 그런 풍으로 끌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내내 아쉬웠다. 너무 비교가 되어 좀 괴로웠음.
같은 액자식 구성이지만 몰입과 탄성이 절로 나왔던 돈키호테와도 비교가 됐다.
열렬한 팬이고 감상자 입장에서... 물론 그의 신작없이 굴러갈 수 없는 자전거 같은 발레단이란 건 알지만 당분간 신작 안무를 하지 말고 기존 작품으로 운영을 하면 좋겠다. 세상에 나오기 힘든 안무가가 자기 재능을 낭비하는 건 보고 싶지 않음.
천재의 매너리즘을 느끼는 슬픈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 무대 인사 때 나온 에이프만. ^^ 주연 무용수보다 더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는 건 무용수들에겐 열받을지 몰라도 안무가 자신에겐 아주 즐거운 일일듯.
개인적으로 즐거웠던 일
[#M_ more.. | less.. |음악 감상~
거의 대부분이 내가 연주했던 곡들이다. ㅎㅎ; 이 부분에선 이런 멜로디가 나오지, 저기선 저 악기의 솔로가 나오겠구나. 나도 모르게 악기 키를 잡으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비록 녹음이라고 해도 남이 연주하는 잘 하는 음악을 듣는 건 즐거운 일이다.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 음악을 쓰고 싶다는 유혹을 엄청 받았을 것 같은데 모짜르트의 교향곡들은 그렇게 갖다 쓰면서 끝내 쓰지 않았다.
베를리오즈와 모짜르트의 조합은 생각외로 훌륭했다.
혼자 했던 쓸데없는 생각
프랑스인인 몰리에르는 스페인식으로 돈 주앙. 좀 더 정확히 발음하자면 돈 후앙이 되겠지 오스트리아인인 모짜르트는 이태리식으로 돈 조반니라고 제목을 붙였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다가 자국 발음으로 읽으니 정말 뽀대가 나지 않는단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어로는 쟝. 독일어로는 요한.
절대 그 느끼하고 악마적인 매력을 지닌 바람둥이의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공보다는 방자나 삼돌이에 어울리는 이름. 다른 나라의 고유명사 발음을 선택한 두 사람이 이해가 된다. ^^
차선생이 있으니 행복하게 내일을 기다리고 있음~
온 몸을 때리는 듯한 그 강렬한 충격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갈리차닌이 없는 게 슬프군. ㅜ.-)
개인적인 뒷 얘기 하나
늦으면 안 들여보낸다는 경고를 무지하게 기뻐했던 벌을 받았는지 이날 LG로 가는 길은 정말 기록적으로 험난했다.
전철공사 이후 그쪽 라인에 차를 가져가는 건 자살행위이기 때문에 적당한 시간에 전철역으로 갔다. 그런데 모모 단체의 선로 점거 농성으로 인해 -어디냐고!!!!! 방송을 제대로 못들었기에 망정이지 들었으면 그 단체 홈피에 테러했을듯- 내가 가려는 방향 열차가 안 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으아악!!!!!
택시를 타러 나오다 보니 시간이 너무 어정쩡. 길이 안막히며 충분하지만 안 막히는 건 나를 위해 교통통제를 해주지 않는 한 불가능이다. 다시 전철역으로 컴백해서 다른 라인 열차를 타고 3번을 갈아타서 직전에 세이프.
못생긴 처녀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고 갈아타는 곳에 가자마자 직전에 전철이 하나씩 출발하는데 정말 환장하겠다는 심정이 바로 이거로구나 했다.
정말 재수없으려니 별 일이 다 생긴다. -_-;;; 모든 흉사를 열우당에 갖다 붙이는 우리 부친을 흉내내서 한마디 하자면... 딴나라당이 설치니 전철까지 말썽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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