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Goebbels로 1990년에 나온, 꽤 된 책임에도 세월의 흔적을 그다지 느낄 수 없는 꼼꼼함과 참신함이 있다. 아마 이건 괴벨스와 나치, 히틀러가 권력의 정점으로 향해 가던 그 시대의 분위기와 지금 한국땅의 모습이 소름 끼치게 흡사하다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06년에 한참 2차 대전과 히틀러, 나치 관련 책들을 읽을 때 구입했는데 장장 1055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위기와 두께에 눌려서 훌훌 몇장 앞뒤로 넘겨보고 아예 읽을 엄두를 못냈었다. 그러다가 특집 끝나고 좍좍 쥐어짜인 내 뇌에 뭔가 좀 쑤셔넣어줘야할 것 같아서 작심하고 선택했다. 그리고 이 독일인들의 모습이 현 당선자 일당들의 행보와 겹쳐진다는 점도 선택에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괴벨스라는 현대 정치 선동과 선전의 달인이자 선구자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1920년대부터 45년까지 유럽 정치, 특히 나치 치하 독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크고 비교적 투명하고 더불어 엄청나게 재미있는 거울이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요약은 사실상 내 능력으로는 좀 불가능이니 그냥 내게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단상만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1. 나치 집권 과정에서 보여진 그 기적의 드라마. 소수의 지지를 받는 극우파 민족주의 정당이 어떻게 독일의 지배자가 됐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로이트는 냐치의 성공 이오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경제난과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아주 단순한 약속'을 던졌고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요새'라는 믿음을 자본주의자들에게 줬다. 이 상하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그들은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에 나치스와 독일이란 단어를 뺀다면 21세기의 어느 나라와 엄청난 싱크로율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2. 20세기 중반의 베를린. 서구에서 가장 사회주의 색채가 짙고 급진적이면서 독창적인 음울함이 가득했던 도시. 괴벨스 입장에서는 죄악의 구렁텅이. 뮤지컬 캬바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그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이었을지가 이 책을 보면서 입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유스러운 일종의 퇴폐와 급진의 해방구가 극단적 전체주의와 민족주의로 무장한 소위 꼴통에 의해 어떻게 와해되어 갔는지를 볼 수 있다. 뮤지컬 캬바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930년대 말 베를린에서 괴벨스가 벌인 그 혹독한 문화청소를 씁쓸함과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듯.
3. 인간의 컴플렉스에 대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한다. 만약 나치 독일이 패하지 않았다면 괴벨스의 악덕은 싹 가려지고 그는 자신의 신체적 컴플렉스와 배경의 한계를 이겨낸 인간승리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추앙받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치가 패한 덕분에 그의 추진력과 개인적 성공의 동력이 된 그 지독한 컴플렉스의 부패한 산물을 우리는 샅샅이 훑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탄압을 보면서 뭐랄까... 아무리 잘 나도 컴플렉스 많고 꼬인 X과는 멀리하는 게 좋다는 모친의 말씀이 절절이 와닿았다. ㅋㅋ
4. 정말 엄청난 조사와 객관성을 갖고 자기 국가의 치부를 파헤친 로이트라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이런 엄청난 분량을 헷갈리지 않고 시게 읽도록 번역해준 번역자에게도 칭송을. 꼼꼼한 역주와 오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당는데도 진짜 감탄했다. 그런데 한가지. 마그다 괴벨스의 첫 결혼에서 하랄트 하나만 친자식인 걸로 마그다의 첫결혼을 소개한 부분에 나왔는데 괴벨스와 사이에 헬무트를 낳았을 때 죽은 아들의 이름을 땄다는 부분이 의문. 헬무트는 그녀 첫남편이 데려온 의붓아들 이름이 아니었나? 이건 나중에 따로 다른 책들을 좀 찾아봐야겠다.
5. 위대한 패배자나 역사에서 선인이라고 주입되어 내가 호감을 가진 인물과 관련된 역사서나 평전을 읽을 때는 그가 파멸로 갈 때 감정이입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종종 있다. 이번엔 확실한 악당이니 그의 몰락을 신나게 구경할 줄 알았는데 출생부터 성장과 성공을 향한 투쟁을 함께 가다보니 그 몰락 과정이 기대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았다. 관찰자로서 약간은 감정이입이 됐던 걸까?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이싱이나 사상의 방향성이 나와 워낙 다른 고로 좀 안됐다는 정도이지 당신은 이렇게 망해도 당연해! 라는 결론에 시원하게 도달.
6. 여자가 사상이나 혁명에 몰입하면 남자 열보다도 더 열정적이고 무섭다는 류의 얘기를 조반니노 과레스끼가 했었는데 마그다 괴벨스를 보면 그게 정말로 맞는 소리 같다. 자신이 남편과 함께 남아 죽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하나도 아니고 6명이나 되는 애들을 모조리 독이는 동반자살을 하다니.
사진을 보니 정말 예쁜 애들이던데. 자기들이 죽고난 뒤 괴벨스 부부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는 것보다 함께 죽는 게 더 낫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나로서는 절대 이해불가능의 정신세계. 뭔가에 몰입하거나 미치지 않고 이렇게 늘 반쯤은 방관자로 거리를 두는 삶이 현명하다는 인생관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물론 이런 인생관은 대단한 성공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기타여러분으로 삶을 끝낸다. 그래도 불만없다. ^^
7. 고백하건데 적절한 위치에 배치된 다양한 사진들이 없었다면 이 책을 끝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다른 곳에서 잘 보지 못한 사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서 흥미가 배가됐다. 다만 타다 남은 괴벨스의 시체 사진은 빼줬더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들었다. 지은 죄로 따지면 백번 죽어 마땅한 X이긴 하지만 그래도 죽은 자에 대한 아주 최소한의 존중은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긴... 아무 죄 없음에도 박물관에 진열되고 또 사진이 세계 곳곳에 퍼진 이집트 파라오들의 미이라들을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고... 死者에 대한 존중을 따지는 문화권에서 성장한 내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 사진을 보는 기분은 영 찝찝. 하긴 내가 피해자의 입장이었다면 또 오체분시에 효수도 모자란다고 펄펄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8. 괴벨스 어록에서 지금 내가 속한 사회와 연관되어 인상 깊은 것 몇가지만.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 우리나라의 어느 분이 바로 떠오름. 문제는 그게 한분이 아니라는 것. ㅠ.ㅠ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 딱 조선일보네. ^^; 당사자들이 읽으면 제일 뜨끔할 듯. 요즘 중앙일보는 이 적절한 배합조차 못하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 조중동네는 회사 곳곳에 이 명언을 붙여놓지 않았을까?
사놓고 묵혀놨던 숙제를 하나 해결해서 기분은 좋다. 이제 남은 건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이건 얼추 비슷한 쪽수에 책 크기는 괴벨스보다 더 크다. 언제 읽냐. -_-;
책/인문(국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교양인 | 2008.1.2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