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 | 푸른역사 | 2008.2.6-7
한 2년 전에 샀던 책인 것 같다. 책상 아랫쪽 책장에 꽂아둔 바람에 존재 자체를 잊고 있다가 불현듯 떠올라서 가볍게 독파.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이후 탄탄한 글을 쓰는 작가로 내게 각인된 김진송씨의 새책이라서 당시 망설임없이 책을 골랐고 또 이기붕이라는 이름과 특이한 제목도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부터 도대체 저 씨날코가 뭘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당시 부유층들이 즐기던 독일 라이센스의 고급 음료수라고 한다. 이기붕의 집에는 꽤 자주 들어왔던 선물 목록 중 하나였고.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 책을 쓰면서 저자인 김진송씨가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당연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처럼 책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는 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저자가 했던 그 고민의 발자취를 내가 쫓아가고 있다고 봐야 맞을듯.
1959년 이기붕 가에 들어온 1년 동안의 선물 목록과 방문객의 이름을 필사해놓은 공책을 동아일보의 자료실에서 찾아내면서 김진송씨의 상념이 출발한다. 내용과 이름의 면면을 볼 때 결론은 단순하다. 바로 뇌물 목록. 그리고 선물과 사람이 드나든 날짜와 당시 정치의 사건을 대입하면 그 결론은 더옥 탄탄해진다.
그 뻔하디 뻔한 결론에서 저자는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기붕에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어했고 또 가난과 부패로 얼룩진 제1공화국 말기, 그 모순이 극한을 향해 치달아가던 시기에 그 시대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고민하고 다각적인 접근을 해봤다.
그러나 결론은 바뀌지 못했다. 사실 나나 다른 사람이 이런 자료를 갖고 역사 추적에 나섰다면 그 뇌물과 인물들, 사건들의 끈끈한 연결성을 집요하게 파헤쳤을 것이다. 어찌 보면 더 장사가 잘 되고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작업을 저자는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나로선 이해 못할 부분도 있지만 그 이유는 책에 어느 정도 토로가 되어 있기도 하고 여기서는 통과.
1959년 이기붕의 서대문 사택에 들어온 그 목록과 방문객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찝찝함은 그들 누구도 그걸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불한당들의 사회는 그 정점에 오를수록 더욱 강건한 조직을 이루고 권력의 사유화는 공적인 시스템의 사유화로 발전하게 된다. 기득권층은 부정과 부패의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정치 제도의 소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는 책의 한 부분. 50년 전과 지금 사회가 달라진 게 뭐가 있을까?
물론 대놓고 군대 물자를 빼돌리거나 수재의연금을 친척들에게 돌리는 식의 초보스런 부패는 최소한 눈에 크게 뜨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정은 그 순간에만 조심해야 할 범죄이고 그 순간을 제외한 모든 일은 서로 장려해야 할 일들이었다.는 사고방식은 그대로 살아있고 이제는 뭐만 살리면 된다는 식으로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와버려 있다. 이기붕 일가처럼 순진하게 목록 작성을 안 해서 그렇지 전달의 기술과 규모는 50년 동안 더 발전한 것 같다.
역사의 교훈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는 현실이 갑갑하고 숨막혀서 생각의 과정과 편린만 기록하고 그 결론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장미와 씨날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단상 두 가지.
씨날코는 과연 어떤 맛이었을까?
수재의연금을 걷기 시작한 게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부터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50년. 정말 길고 질긴 준세금인데... 연말의 단골 세금인 불우이웃돕기도 그렇고 얼마 걷혔고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회계 보고는 단 한번도 본 기억이 없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이후 탄탄한 글을 쓰는 작가로 내게 각인된 김진송씨의 새책이라서 당시 망설임없이 책을 골랐고 또 이기붕이라는 이름과 특이한 제목도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부터 도대체 저 씨날코가 뭘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당시 부유층들이 즐기던 독일 라이센스의 고급 음료수라고 한다. 이기붕의 집에는 꽤 자주 들어왔던 선물 목록 중 하나였고.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 책을 쓰면서 저자인 김진송씨가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당연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처럼 책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는 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저자가 했던 그 고민의 발자취를 내가 쫓아가고 있다고 봐야 맞을듯.
1959년 이기붕 가에 들어온 1년 동안의 선물 목록과 방문객의 이름을 필사해놓은 공책을 동아일보의 자료실에서 찾아내면서 김진송씨의 상념이 출발한다. 내용과 이름의 면면을 볼 때 결론은 단순하다. 바로 뇌물 목록. 그리고 선물과 사람이 드나든 날짜와 당시 정치의 사건을 대입하면 그 결론은 더옥 탄탄해진다.
그 뻔하디 뻔한 결론에서 저자는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기붕에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어했고 또 가난과 부패로 얼룩진 제1공화국 말기, 그 모순이 극한을 향해 치달아가던 시기에 그 시대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고민하고 다각적인 접근을 해봤다.
그러나 결론은 바뀌지 못했다. 사실 나나 다른 사람이 이런 자료를 갖고 역사 추적에 나섰다면 그 뇌물과 인물들, 사건들의 끈끈한 연결성을 집요하게 파헤쳤을 것이다. 어찌 보면 더 장사가 잘 되고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작업을 저자는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나로선 이해 못할 부분도 있지만 그 이유는 책에 어느 정도 토로가 되어 있기도 하고 여기서는 통과.
1959년 이기붕의 서대문 사택에 들어온 그 목록과 방문객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찝찝함은 그들 누구도 그걸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불한당들의 사회는 그 정점에 오를수록 더욱 강건한 조직을 이루고 권력의 사유화는 공적인 시스템의 사유화로 발전하게 된다. 기득권층은 부정과 부패의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정치 제도의 소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는 책의 한 부분. 50년 전과 지금 사회가 달라진 게 뭐가 있을까?
물론 대놓고 군대 물자를 빼돌리거나 수재의연금을 친척들에게 돌리는 식의 초보스런 부패는 최소한 눈에 크게 뜨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정은 그 순간에만 조심해야 할 범죄이고 그 순간을 제외한 모든 일은 서로 장려해야 할 일들이었다.는 사고방식은 그대로 살아있고 이제는 뭐만 살리면 된다는 식으로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와버려 있다. 이기붕 일가처럼 순진하게 목록 작성을 안 해서 그렇지 전달의 기술과 규모는 50년 동안 더 발전한 것 같다.
역사의 교훈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는 현실이 갑갑하고 숨막혀서 생각의 과정과 편린만 기록하고 그 결론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장미와 씨날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단상 두 가지.
씨날코는 과연 어떤 맛이었을까?
수재의연금을 걷기 시작한 게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부터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50년. 정말 길고 질긴 준세금인데... 연말의 단골 세금인 불우이웃돕기도 그렇고 얼마 걷혔고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회계 보고는 단 한번도 본 기억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