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얘기 하기 전에 칭찬하고 싶은 건 작년처럼 허접한 MC 등장으로 흐름을 마구 끊어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빠지지 않는 투덜거림은, 프로그램마저 바뀌어 있는 걸 보면 캐스팅이 이미 한참 전에 변동됐는데 어디서도 공지하지 않았다는 것. 무시할 수 없는 티켓파워를 가진 루시아 라카라와 시릴 피에르 커플이 빠지면 이런 시국에 에매 취소가 꽤 많을 거라는 걸 감안한 꼼수라는 건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분노.
그리고 예전에 내 홈피 컨텐츠와 내가 써준 국립 발레단 컨텐츠를 상당부분 베껴 짜집기한 프로그램의 작품 해설에는 더 분노. 그나마도 양쪽에 설명이 없는 현대작품들은 아예 해설도 해놓지 않았다. -_-; 해당 발레단에 문의해보거나 구글링을 조금만 하면 찾아낼 수 있는 건데 찾고 번역하는 게 귀찮았던 거겠지. 돈을 주고 파는 거면 돈값을 해야하는데 공짜로 먹으려는 거지 근성이 정말 짜증난다.
그래도 공연이 전반적으로 괜찮아서 분노가 폭발하지 않고 그냥 진화됐음.
1부 공연의 시작은 볼쇼이 발레단의 안톤 안토니체바와 드미트리 벨로골로프체프의 에스메랄다 중 다이아나와 악테온.
둘 다 역량이 좋은 무용수인데.... 아직 몸이 덜 풀렸는지 아니면 그들에게 별로 잘 맞지 않는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저 사람들이 맞나 싶게 딱딱하고 그저 그랬음. 별 감흥 없었고 안무를 따라가면서 춤추느라 급급하다는 느낌까지.
다닐 심킨의 Moorhuhn
공연 끝나고 만난 ㅇ씨의 말처럼 정말 앙큼한 고양이 같은 춤을 추는 골든 보이. ^^ 2003년인가 2004년에 아버지 드미트리 심킨과 함께 공연왔다가 한국 누나들에게 찍혀 아버지는 팽 당하고 거의 매년 오고 있는데 해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쏠쏠한 즐거움이다. 올해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줘서 흐뭇~
발레리나를 서포트하는 능력이 필수인 남자 무용수로서 좀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이런 솔로 작품에서 진짜 빛난다. Moorhuhn이 뭔지 해설도 없고 해서 열심히 사전을 찾아봤는데 없는 단어로 나오고 비슷한 단어가 moor·hen = 암컷 뇌조라는데 익살스런 새를 연상시키던 춤을 떠올리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음.
심킨의 도약이나 유연함, 그리고 자체 발광 카리스마를 보면 왠지 모르게 니진스키가 떠오른다. 니진스키도 이렇게 작은 키였다는데. 심킨이 목신의 오후나 장미의 정령, 페트루슈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그리고 힘을 좀 더 키워서 코펠리아도.
Petite Mort 작은 죽음은 핀란드 국립 발레단의 하은지와 야코 에롤라.
하은지라는 무용수를 다시 보게 해준 무대였다. 탄탄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자기 인체의 통제력을 확보했을 때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다채로운 표현력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무대. 하은지의 움직임을 보면서 20대 초반에 많은 기대를 갖게 했지만 점점 겉멋과 덕지덕지 붙은 화장으로 실망감을 안겨준 국립 발레단의 모 발레리나가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이 느낌은 2부 무대를 보면서 더 강해졌음.
이리 킬리안의 직접 통제와 지도를 받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의 단원들이 보여줬던 Petite Mort에 전혀 뒤지지 않는 표현력과 움직임. 앞으로 지켜보고 싶은 무용수들이다.
라 스칼라 발레단의 마르타 로마냐와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의 이나기 우레자가의 흑조 파드되.
참으로 오랜만에 백조인지 흑조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흑조를 만났다고 요약되겠음.
도로테 질베르와 마뉴엘 르그뤼의 마농 중 베드룸 파드되.
현역 무용수 중에 가장 내 취향인 르그뤼. 아주 운이 좋지 않은 한 내가 마누엘 르그뤼의 공연을 무대에서 직접 보는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아무래도 더 집중을 하게 된다. 특별히 튀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물 흐르듯이 매끄러운 춤을 추었다고 생각됨.
혹시나 르그뤼의 공연을 볼 수 없을까 파리 갈 때마다 오페라 발레단 공연에 일정을 두번이나 맞췄었는데 결국 전막 공연은 못 보는 모양이다. 아쉬움.
중국 국립발레단의 장지엔& 성시동의 백조의 호수 2막 파드되.
중국 발레단의 그 기예단 수준의 테크닉은 익히 아는 바라서 기교만큼은 엄청나게 뛰어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 예술성도 있었다. 장지엔은 중국 무용수들에게 갖고 있던 편견을 상당 부분 걷어갈 정도로 기교를 압도하는 예술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백조의 호수 2막을 루시아 라카라가 했더라면 얼마나 근사하고 환상적이었을지를 알기에 아무래도 평가가 박해질 수밖에 없음.
딴소리지만 정말 루시아 라카라의 백조의 호수 전막을 꼭 보고 싶다. 아마 보다가 기절해버릴지도.... ㅎㅎ;
올레샤 노바코바&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의 차이코프스키 파드되.
키로프의 20대 남자 무용수 중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청년이라 많이 기다렸는데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백조의 호수 마저도 지그프리드 왕자의 즐거운 (ㅇ양은 행복한으로 표현했음) 모험 여행으로 만들지만 그것마저도 '래, 지그프리드는 이제 갓 20살이야. 저게 더 정상이야.'라는 변명을 관객 스스로 만들게 하는 내공의 소유자 사라파노프.
입이 떡 벌어지는 정교함과 빠르고 정확한 테크닉을 가진 그에게 잘 맞는 작품인 것 같다. 파트너와의 파트너쉽도 다른 커플들보다는 딱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암. 올레샤 노비코바도 키로프 답게 정확하고 딱 발레적인 멋진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광채 면에서는 아무래도 사라파노프에게 조금은 밀림.
발레리나에게 가장 열받는 일이 파트너인 남자 무용수보다 박수를 덜 받는 일이라는데 사라파노프는 이날 파트너를 좀 열받게 하는듯.
짧은 휴식을 취한 뒤 2막. 프로그램과 달리 순서에 변경이 좀 있었다. 그런데 안내 자막이 이상하게 뜨는 바람에 프로그램 자체가 변경된 줄 알고 또 잠시 열받았었음. 세종이 아직도 정직원 쓸 돈이 없어서 인턴들로 돌리는지 모르겠지만 인턴이라도 국어 공부들을 좀 한 사람들을 뽑아 쓰면 좋겠다.
2부의 시작은 하은지와 아코 에롤라의 그랑파 클래식 파드되.
기분 좋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꽤 볼 만하고 안정적인 그랑파 클래식이었다. 그런데 1부의 Petite Mort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인지 하은지는 당분간 내게 클래식보다는 현대 발레가 더 어울리는 무용수로 기억이 될 것 같다.
안토 안토니체바와 드리트리 벨로골로프체프의 스파르타쿠스.
볼쇼이의 대표 브랜드이고 또 그걸 수없이 춤췄왔던 볼쇼이의 수석 무용수들답게 잘 췄음. 갈라 공연의 한계상 엄청난 감정 이입이나 감동까진 아니었지만 해설 발레에서 버벅거리는 스파르타쿠스 갈라가 아니어서 좋았다.
로마냐와 우레자가의 탱고 아르헨티노.
이번 갈라에서는 잘 보지 못한 현대 작품들을 하나씩은 준비해온 것 같아서 나름 즐거움이 있었다. 앞서 흑조가 너무 색채감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건 낯선 작품임에도 오히려 더 친숙하고 재미가 있었다. 이 커플은 무난하고 안정적이긴 하지만 별다른 인상이 남지는 않는다.
장지엔 & 성시동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중국 국립 발레단에 꽤 흥행성있는 모던 발레 작품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그런 쪽으로 선곡을 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무난하고 평이한 안무에 묻혀 두 사람의 매력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1부에서 느꼈지만 장지엔 언니의 몸매는 같은 동족의 자신감을 엄청 뺏는 감이 있다. 서양인이면 '나랑 유전자 자체가 틀려!' 라고 우겨볼 수나 있지. 이건 같은 동양인이 저런 이기적인 비율에 완벽한 곡선을 가져도 되는 건가. -_-;
신체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성시동은 아직 장지엔의 보조자지 동등한 파트너로서 아우라가 모자란다. 그래도 관객이 보기엔 남자보다는 여자 쪽의 광휘가 강할 때 더 균형감을 느끼니 어찌 보면 다행인듯.
다닐 심킨과 한서혜의 돈키호테 3막 결혼식 파드되.
완전 빌레 테크닉의 교본을 보여주는 턴 아웃에 훨헐 날아다니는 다닐을 위한 역할.
니진스키의 공연을 보면서 당시 여인네들이 기절하고 어쩌고 했다는 얘기를 읽으면서 참으로 오버로구나 했는데 얘가 조금만 더 날아다니면 나도 그 수준에 도달할 것 같음. 위에서 썼듯이 니진스키의 전설적인 작품들을 다닐이 하면 정말 어울릴 것 같다.
다닐 심킨의 파트너가 바뀐단 공지를 봤을 때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여자 무용수의 능력에 대해 걱정이 컸는데 앞으로 주시해고 지켜보고 싶은 무용수 발견. 보기 드물게 안정적인 테크니션이다. 근데 둘이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둘 다 파트너쉽을 통한 상승 작용은 심하게 부족. 각자 솔로를 출 때는 와~ 소리가 나오는데 함께 붙기만 하면 아슬아슬 실수연발. -_-;
특히 혼자 춤 출 때는 눈부시게 빛나던 우리 예쁜 다닐이 파트너를 들어올릴 때마다 후들거리는 걸 보는 건 마음이 아팠음. 작은 걸로 치면 바리시니코프도 만만찮은데 얘는 왜 이리 가냘프게 보이는지. 하늘이 내려주신 카리스마는 타고 났고 테크닉도 이만하면 됐으니 다닐은 힘을 좀 길러야할 것 같다.
10월에 ABT로 이적한다는데.... 다닐하고 키가 유일하게 맞을 알렉산드라 페리는 조만간 은퇴할 것이고....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발레리나들은 다들 한 기럭지들 하시는데. ABT가 다닐을 스타로 만들려면 필히 그의 파트너가 될 여자 무용수를 발굴해야 할 것 같다.
다닐의 돈키호테 전막과 코펠리아를 보고 싶음. 둘 다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음. *^^*
도로테 질베르와 마뉴엘 르그뤼의 Noages
파레 오페라 발레단은 진짜 이리 킬리안의 작품을 좋아하는 듯. 오랜 교류가 있어서 그런지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의 무용수들 이상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킬리안의 안무를 소화하는 것 같다. 마농보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둘의 파트너쉽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노비코바와 사라파노프의 해적 2막 중 파드되
전혀 알리스럽지 않은 알리지만 역시나 사라파노프이기 때문에 용서한다. ^^; 분위기는 좀 아니지만 테크닉이나 안무는 확실히 사라파노프에게 어울리는 작품이다. 삐루엣에서 숨이 턱턱 넘어가도록 돌아가주지만... 그래도 내게 최고의 알리는 앙헬 코레야와 이고르 젤린스키임. 대조적이지만 각각 스펙트럼의 끝에서 최고의 알리를 보여준 관계로.
아직 어리니 사라파노프도 또 다른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겠지. 진짜 이 총각(인지 젊은 유부인지 모르겠지만)의 돈키호테 전막을 보고 싶다.
근데 좀 이상할 것 하나.
마지막 인사를 르그뤼가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사라파노프 커플이 마지막 인사를 한 건 좀 이해가 안 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