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Le Cycle du Graal: La Mort du Roi Arthur tome 8 로 1996년에 발간된 책이다. 한국에선 2005년에 나왔는데 그때 발간 기념으로 할인이며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던 때에 샀으니 대충 3년 여를 묵히다가 드디어 끝을 낸 셈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더 오래된 책도 안 읽은 게 있으니 그럭저럭 선방. ^^;
7권을 끝내면서 예정된 파국을 구경하는 8권을 시작하려니 기분이 좀 그렇다고 했는데 읽는 중간에는 열을 좀 내면서 보긴 했지만 다 읽고 난 소감은 비극만의 카타르시스라는 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아더왕이 그런 비극이나 배신 없이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편히 죽었더라~로 끝났다면 이렇게 오랜 생명력을 갖고 중세를 대표하는 텍스트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발론 연대기는 약간의 오픈 엔딩 + 채워지지 않은 원을 남기고 있기에 그 여운으로 전설이 되었을 거란 생각을 8권을 덮으면서 했다.
서설이 엄청 길었는데 8권 내용의 전반부는 일종의 독립된 이야기로 더 널리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얘기를 비롯해서 성배에 집중되어 뜸해졌던 기사들의 모험담들이 차지하고 있다. 동화나 오페라 등등에서 만나던 옛날 이야기들을 보는 즐거움이 쏠쏠했음.
그리고 기네비어와 란슬롯의 오랜 부정이랄까... 금지된 애정 행각이 드러나는 것까지는 현대인의 논리로 충분히 이해되는 구성인데 그 이후부터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며 심리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뭐 낀 놈이 성낸다고 어쩌고 저쩌고 온갖 변명을 갖다 붙여도 기네비어와 란슬롯은 분명 불륜이고 그 자체는 당시 시대의 잣대에선 죽을 죄고 현대로 와도 칭찬받을 관계는 아니다. 그런데 그걸 세상에 드러내도록 만든 인간들은 죽일 놈이 되고 란슬롯과 그의 일가 친척인 기사들은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는 그런 묘한 전개라니.
아발론 연대기가 중세에 배경을 두고 있지만 그 뿌리는 캘트의 여신 신화의 기독교적인 변형이라는 걸 감안하고 해석을 가하면서 읽어야지 현대인의 사고 구조로서 란슬롯과 기네비어의 논리는 이해 불가능이다. 본인이 스스로 엄청 도덕적이거나 진중권 스타일의 논리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8권 중반부는 살짝 피해줌이 현명할지도. ^^; 디-워를 뛰어넘는 논리 무시의 절정이랄까.
가웨인을 란슬롯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둘의 대결에서 란슬롯이 이기고 가웨인이 죽은 건 엄청 분노. 만약 내가 이 세계관을 배경으로 뭔가 글을 쓰게 된다면 란슬롯을 모티브로 한 인간은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ㅎㅎ; 개인적으로 볼 때도 란슬롯 같은 스타일의 남자는 영.... -_-;;;
아더왕의 등장 때부터 뭔가 엄청난 일을 일으킬 것처럼 복선이 깔리고 묘사됐던 모드레드는 마지막에 진짜 큰 일을 치고 왕국을 무너뜨리는 본인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동안 깔린 복선에 비해서 좀 약했다. 최후의 악당으로서 적합한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음.
전에도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만큼 각주를 보는 즐거움을 보는 책은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숨은 뜻은 고사하고 단어나 문장을 옮기기에도 능력 딸리는 번역자가 아니라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는 적절한 번역자를 선택해줬다는 걸 출판사에 감사하고 싶다.
진짜 오랜만에 단편적인 모음이나 남의 시각에서 편집된 (물론 이 아발론 연대기도 수많은 이본과 판본을 저자가 편집한 것이긴 하다) 다이제스트본이 아니라 큰 덩어리를 읽어냈다는 것이 스스로 뿌듯하다. 독서를 계속하게 하는 힘중에 자기 만족과 과시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책/픽션
아발론 연대기 8 - 아더 왕의 죽음
장 마르칼 | 북스피어 | 2008.5.2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