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가가 진짜 천운을 타고난 건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주말이어서 이동에 애로가 꽃이 피었지만 작심하고 전철로 움직인 덕분에 시간은 딱딱 맞춰서 움직일 수 있었다.
국내선수들에 대한 상식 이하의 푸대접에다 세팅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내부의 일은 당사자가 아니니 잘 모르니 패스하고, 소비자 입장에서 정당한 투덜거림은 몇가지 하고 가야겠다.
가사 대본과 의상 스케치가 포함된 거의 책 수준의 오페라 프로그램에 적합한 만원이라는 거금을 받고 판매한 프로그램 북. 제대로 훑어보지 않고 좀 비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산 내게도 책임이 40%는 있지만 진짜 심각하게 부실하다.
자고로 프로그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면 선수들의 정확한 프로필과 그날 공연하는 프로그램명, 거기에 대한 간단한 안내는 필수다. 그런데 공짜로 배부하는 2면이나 4면짜리 팜플렛과 하나도 -정말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 사이즈만 키운 반복되는 비슷한 사진들이 무질서하게 이어지고 통상 초반과 후반에 집중해야할 광고면이 케이블 TV의 중간광고처럼 그나마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용 부분 중간중간에 치고 들어와있다.
그나마도 또 문제가 있었던 게 한국 선수들의 출연 순서는 아예 프로그램에서도 빠져있었다는 것. 2부 시작 전에 할 예정이면 그게 인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얘기를 미리 들은 터라 아예 어긋나서 빠져버렸는데 그냥 덮고 밀고 나온 건가 하는 걱정까지 했었다.
기획이라는 걸 했고 또 10000원이라는 프로그램계에서는 최고가에 속하는 거금으로 판매를 한다면 감탄할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기본 정보는 제대로 줘야지, 그나마도 없는 이번 프로그램은 완전히 사기였다. 나보고 하루 전날에 만들라고 해도 이것보다는 나았겠다. 비유를 하자면 한우 가격으로 미국산 스탠다드급 -아마도 한국으로 오게 될 최하위등급- 소고기를 팔아먹었다고 보면 되겠다. 속은 X이 병신이지만 맛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뻔히 눈 뜨고 바가지를 옴팡 뒤집어쓴 기분이 아주 X 같았다.
다음부터 이런 스포츠 행사에서 파는 프로그램은 필히 내용을 체크하고 구입하기로 결심했다. 한번 속는 건 속이는 놈이 나쁜 거지만 두번 속는 건 속는 놈이 병신이니까.
시작 시간 안 지키기.
2시 반이라고 공지를 해놨더라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는 등등을 감안해서 한 십여분 늦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한 잠실 학생체육관 의자에서 무려 예정시간보다 40분을 더 기다리게 하다니. -_-; 일찍 도착한 덕분에 우리가 기다리면서 낭비한 시간은 1시간이 훨씬 넘었다. 현대카드에서 돈을 쏟아부은 덕분에 가능했던 행사니 끝없이 이어지는 현대카드 CF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예정보다 40분을 더 듣다보니, 그리고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주최측의 행사 진행을 보니 아무래도 2시 반이라고 공지만 해놓고 실제 공연 시간은 3시로 잡아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시작부터 김이 많이 빠졌다.
이외에도 소소한 불만이 많지만 본론 들어가기 전에 기운을 너무 빼는 것 같아서 패스하고 선수별로 간단한 소감만 끄적여놔야겠다.
김세열팀 주니어와 노비스들의 오프닝 군무.
신체점제에 맞춰 훈련받는 아이들이라 지금 시니어들의 반 정도만 가능한 비엘만이 죽죽 되는 걸 보면서 혼자 감탄감탄~ 스피드감도 확실히 있고. 다들 다치지 말고 제대로 크면 좋겠다.
이 팀이 받은 대접이나 기획사의 삽질을 생각하면 열이 오르지만.... 썰렁한 객석을 상대로 혼자 뛰던 아이들이 큰 무대에서 환호를 경험하고 관중들과 호흡하는 방법을 익히는 건 좋은 일이니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김연아 덕분에 피겨 시장이 조금이나마 커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기하는 경험이 조금씩 생기면서 '반응을 유도하고 즐기는 스케이팅'을 하는 선수들이 확실히 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몇년 전부터 내가 계속 스토킹하면서 예뻐라하는 이호정양이 작년 시즌에는 기술적으로 기대만큼 많이 진보를 못했는데 올해는 그 반짝반짝하는 표현력과 존재감을 확 업그레이드시킬 난이도 높은 점프들을 안정되게 장착하고 오기를... 편애모드. ^^
먼저 제냐.
살이 많이 빠진 제냐의 코믹하면서도 흥겨운 갈라쇼. 근데 프로그램 이름을 모르겠다. 제냐라서 가능한 쥐락펴락이긴 하지만.... 은근히 카루소를 기대했었고 사실 그의 컴페티션 프로그램을 보고 싶다는 배부른 바람이 있다보니. ^^ 어쨌거나 기획사! 프로그램 제목도 알려주지 않냐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하나만 하고 나오지 않아서 그것도 좀 불만. 내 자리가 출입구 반대편이라 그쪽 모습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데 쇼 중간중간 여친을 열심히 챙기는 모습이 재밌었다. 귀여운 냉미소년의 포스를 풍기던 보송보송한 핏덩이 때 봤던 녀석이 벌써 애 아범에 이혼남에 몇번째인지 모를 여친을 데리고 오다니. 세월무상이다. 그때는 코도 작고 예쁘게 잘 클 것 같았는데.... ㅎㅎ; (미안 제냐~)
김나영 선수.
국악버전의 아베마리아를 했는데 많은 관객의 호응과 호흡이 선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정확한 예라고나 할까. 작년 요맘 때던가 아시안 트로피 때 그 무표정하고 재미없는 스케이팅은 간데없고 아직 조금은 수줍어하지만 자신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예쁜 아가씨가 됐다. 동작이 전체적으로 커지고 자신감이 많이 붙어서 그런지 훨씬 부드럽다. 물론 스파이럴이며 섬세함 등등에서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질 높고 단단한 점프를 가진 아가씨니 시즌 중에 보강을 해나가면서 성장을 하겠지.
2부 오프닝 때 야구딘, 제냐와 3인 댄스를 했는데.... 확실히 아직 어리긴 하더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함. 좀 더 끈끈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연출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역시 세월이 필요하니 풋풋한 모습을 구경했다는 걸로 만족.
팡&통 페어
1부 프로그램은 괜찮다 정도였고 백미는 2부의 아다지오. 갈라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ㅠ.ㅠ 앞으로 중국 페어는 예술성 제로에다 촌스럽다는 구박은 최소한 이 팀 앞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줬음.
동행자 중 유일한 유부인 ㅅ는 통 오라버님에게 꽂혀서 '역시 유부는 미모가 아니라 힘을 본다'라는 우리의 무수한 놀림을 받았음. ㅎㅎ;
에반 라이사첵.
모범생 답안처럼 잘 타기는 하는데 참 기억에 남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거기다 말도 4가지 없이 해서 먹지 않아도 될 욕까지 들어먹는 총각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라이사첵인데 한국과 궁합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인간이 되어가는건지 작년 사대륙부터 좀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고 해야하나? 전에 없었던 교감이 보이는 것 같다.
그 길쭉한 기럭지를 최대한 살린 프로그램인 조로에서 맛을 가게 하더니 2부 빌리진에서는 완전 광란의 도가니 클럽으로 링크장을 변신시켰음. 팬들한테도 쌀쌀맞고 엄청 분위기를 잡는 애였는데 요즘 한국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솔직히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
미키 안도.
1부에서는 올 시즌 새 갈라인 볼레로, 2부는... 작년 갈라였는데 제목을 잊어버렸다.
이 아가씨는 섹시한 쪽으로 컨셉을 완전히 잡은 것 같다. 내가 볼 때 훌륭한 선택인 것 같음. 마오가 섹시하게 나오면 어린애가 엄마옷 훔쳐입고 화장품 덕지덕지 칠한 것 같은데 천하지 않으면서도 몸에 착 달라붙는 성적 매력이 확실히 있다. 좀 진하게 생겨서 그런 건가?
사람들은 2부 갈라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난 1부의 볼레로에 완전히 꽂혔음. 정말 미키를 위한, 미키에게 딱 맞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내가 간 날 계속 점프를 실수하고 타이밍을 못 맞춰서 작년 근육파열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나 싶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20일날은 모두 클린했다고 함.
부상 관리 잘 하고 올 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내면 좋겠다.
스테판 랑비엘
19일에 사실상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작년에 목동에 불나서 쇼가 취소된 이후 Poeta를 직접 보는 건 사실상 포기했는데 봤다. ㅠ.ㅠ 랑비의 그 플라멩코.... 피겨에 플라멩코를 응용한 프로그램은 많지만 가장 근접한 건 바로 이거지 싶음. 존재 자체만으로 주위 기온을 올린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부 로미오와 줄리엣도 멋졌지만 내 취향은 Poeta쪽. 2006년 올림픽 때 그 귀엽고 풋풋한 영농소년이 이렇게 멋진 남자로 변신하다니. 흐뭇~ ^^
마리-프랑스 듀브릴& 페트리스 라우종
정분이 난 커플은 확실히 그 화학작용이 연기에도 드러나는 듯. 아이스댄스는 잘 모르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 고로 긴 얘기는 못 쓰겠고... 볼만은 했다. 달달하니 부러움을 유발하는 커플이었음.
제프리 버틀
1부는 리본 인더 스카이, 2부는 퍼스널 지저스.
사실 난 제프의 좀 클래식하고 서정적인 프로그램을 심하게 애정하는 터라 이번 갈라는 살짝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마 팔라아치를 해줬다면 나도 감동으로 데굴데굴 굴렀을 수도.... 그래도 귀엽고 샤방한 총각이라는 생각은 안 할 수가 없었음. 사대륙 때 그야말로 폭발했던 인기를 경험한 터라 폭발적인 반응에 좀 얼떨떨해 보이는 랑비와 달리 너무나 당연하고 느긋하게 팬들의 반응을 즐기고 유도하던.... 아무래도 한국땅은 왕자병을 양산하는 바이러스가 있는 것 같다. ^^;;;
사샤 코헨.
1부 프로그램은 의상을 보니 본 기억이 나는데 가물가물. 2부는 Hurt.
1부는 별로 인상이 남지 않았고 사샤의 전매특기인 그 놀라온 유연성과 고양이 같은 우아함을 만끽하는 건 2부였지 싶음. 스파이럴의 각도나 모양이 완전 차원이 다르니... 딕 버튼 영감탱이의 그 막장 국수주의 해설을 엄청 싫어하지만 사샤의 샬럿 스파이럴을 직접 보니 스파이럴 할 때마다 그 영감이 신음을 내지르는 게 좀 이해가 되긴 했다. 그리고 진짜 깜찍한 스플릿 점프. 턴아웃은 진짜 타고난 모양이다.
점프가 조금만 더 안정적이라면 진짜 그 막강한 국가빨에 금메달도 가능했었는데... 하느님이 다 주지는 않는 모양.
벨빈 & 아고스토
유명한 섹시 백을 드디어 봤고 또 Falling slowly라는 프로그램을 했음. 벨빈 언니 진짜 예쁘심. 진짜 몸매 죽이심. 에반은 전생이 무슨 착한 일을 한 걸까. 이 생각만 내내 했었다. ^^
아사다 마오
여인의 향기와 sing sing sing.
직접 링크에서 본 건 처음에데 참 특이하게 점프를 뛴다는 느낌을 받았고 (살짝 쥐어짠다는 느낌인데.... 묘사를 하자면 톡-뾰로록?) 여인의 향기가 몸에 착 달라붙으려면 좀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작년까지 썼던 그 하바네라를 할 때마다 느꼈던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이질감이랄까... sing sing sing이 마오에게는 잘 맞는 갈라인 것 같다.
내가 간 날은 컨디션이 괜찮았는지 점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했는데 20일날은 좀 말아먹고 링크와 관객탓을 한 모양이다. 욕 바가지로 먹고 있음. 정신연령이 어리다고 해야하나... 얘도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안 먹어도 될 욕을 버는 타입인듯.
알렉세이 야구딘.
1부는 권투선수와 팀닥터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코믹한 프로그램으로 사샤가 찬조출연을 했고 야구딘의 쇼맨쉽을 즐긴다는 정도. 본편은 2부. '오버컴'을 봤다. ㅠ.ㅠ 메모리얼이나 글라디에이터나 아이언 마스크, 혹은 레볼루션 에튜드를 해줬다면 진짜 좋았겠지만 그래도 오버컴이라도 어디냐. 이렇게 하나씩 보고다묜 언젠가 나머지도 볼 날이 있겠지.
19일도 괜찮았지만 20일의 오버컴이 진짜 신이 내린 연기였다는데... 살짝 부러움.
2부 오프닝은 국내 주니어들이 해줬는데 불과 몇달 사이에 확 는 것에 보여서 완전 해피 모드~
이동원
삼바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곡 이름을 잘 모르겠다. 형광팬으로 그린 것 같은 의상에 살짝 긴장했지만 저 나이 때나 가능한 의상이려니 하면서... ^^ 볼 때마다 쑥쑥 느는 게 느껴져서 이 아가의 경기를 보는 건 늘 즐겁다. 본인의 재능도 있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서 누님들과 이모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다보니 애정과 환호성을 즐기는 게 눈에 보인다. 올 시즌 경기에 어떤 프로그램을 갖고 올지 엄청 기대중~
곽민정
극강의 유연성은 인정하지만 트리플을 뛸 때 점프 높이가 너무 낮아서 늘 불안불안했는데 높이도 좋아지고 회전도 더 빨라진 것 같다. 올 시즌 주니어 과제가 러츠인데 작년에 딱 한번 성공했던 러츠를 갈라에서 깨끗하게 랜딩. 지금 이 정도면 시즌이 될 때는 훨씬 안정적이 된다고 볼 때 기대가 많이 된다.
김민석
이 총각이 내가 알던 바로 그 총각인가? 의심을 갖게 할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유일한 주니어 남자 국가대표다 보니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세계 무대에 내놨을 때 많이 부족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인데... 퀄리티가 확 달라진 점프들을 보니 올해는 진짜 기대 만빵이다.
'나이도 어린 게 이미 느끼한 게 뭔지 확실히 알고 보여준다'는 동행한 ㅅ양의 멘트처럼 관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도 아마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올해 힘든 일이 많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힘내서 좋은 성적을 얻으면 좋겠다.
이렇게 찬조출연으로 출연했던 선수들이 나중에 메인 게스트로 초청되는 날이 있겠지? 발레에서는 이미 몇몇 그런 케이스를 봤는데 피겨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래 팬질을 하려면 자금은 필수. 열심히 돈 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