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오두진 | 인물과사상사 | 2005. 10. ? ~ 11. 7
강준만. 시끄러운 것에 비해서 내게 큰 관심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이름이다. 그래도 호불호에서 굳이 양자택일을 하라면 불호에 가까운 쪽인데 이 책을 보면서 호쪽으로 상당히 접근.
이유는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까마득히 어린 제자와 이름을 나란히 올린 책을 내고 그 책 서문에 제자의 역할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자가 다 써도 이름은 교수의 이름만 찬란하게 박혀 나가는 것이 부지기수를 넘어 당연한 한국땅에서 일단 시작은 책 내용과 상관없이 신선한 감동이었다.
내용은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란 도발적인 제목에서 기대하는 딱 그 정도의 무게와 함량이다. 책 서문에 강준만 교수가 인정했듯 이 오두진이란 제자가 거둬온 그 엄청난 자료를 좀 더 알차게 엮은 책을 기대하게 하는 적당한 가벼움과 흥미가 이 책 안에 가득차 있다.
굳이 느낌 정리를 하자면 거한 원본이 있는 책의 요약본을 읽은 기분이라고 할까?
커피가 한국땅에 들어온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시대별로 나눠서 커피에 얽힌 에피소드와 한국땅에 커피와 다방이 정착되고 진화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얘기해주고 있다. 거기서 좀 더 파고 들고 싶은 독자들에겐 못내 아쉬운 정도의 깊이. 이 부분은 언젠가 오두진에 의해 아니면 다른 커피광에 의해 또 다른 책이 나오길 기대하는 수밖에.
1970년대 이전은 당연히 생소하지만 80년대로 들어오면서는 눈에 익은 이름들이 하나씩 나오니까 더 재미있다.
제일 먼저 난다랑. ㅎㅎ;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있었다. 지금은 일마레라는 그 맛 디럽게 없는 파스타 집이 있는 그 자리에 꽤나 오랫동안 자리 차지를 하며 누군가 성적이 엄청 올랐다거나, 콩쿨에서 상을 받았다거나 하는 특별한 날 거기서 정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단 한번도 그 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커피를 판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거기가 바로 고급 원두커피 전문점의 효시였다는 걸 난다랑이 다 사라진 지금에야 알게 됐다.
르네상스, 필하모니. 대학에 가면 꼭 가보리라 지나갈 때마다 결심했는데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ㅠ.ㅠ 거기서 음악 듣던 선배선생님들이 대부분 선배였으니까들의 낭만은 그렇게 우리랑 상관없이 훨훨~
자뎅. 도토루. 내 학원 친구 하나가 도토루의 커피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커피는 당연히 어두컴컴한 카페나 다방에서만 파는 것으로 알고 있던 촌스런 나를 커피 전문점의 세계로 이끈 장소였는데. 종로에서 영어학원 다닐 때는 커피값 싸고 환~한 도토루를 거의 아지트처럼 활용했었는데... 자뎅은 간혹 보이는 것 같지만 도토루는 사라진듯.
헤이즐넛 커피로 대표되는 향커피. ㅋㅋ 여기에 얽힌 나의 기억 하나. 내 선생님 부인이 당시 날리기 시작한 SE라는 커피 전문점을 차리셨다. 제자 된 입장에서 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때 메뉴판에 헤이즐넛 커피, 초콜릿 라스베리 이름도 안 잊어버림. 문화쇼크가 엄청 컸던 일이라... 등등이 써 있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커피에 초콜릿하고 라스베리가 나오나보다. 값이 비싸도 이왕이면 뭔가 딸려나오는 걸 마시자 생각하고 그걸 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는 것은 달랑 커피 한잔. 차마 초콜릿 언제 주냐고 묻지 못하고 고민하다 나중에야 초콜릿과 라스베리 향이 나는 커피라는 것을 혼자 깨우쳤다. ㅎㅎ
이런 오래된 기억 창고들을 자극하는 책이다. 각 시대별로 커피에 관한 가요들 리스트가 줄줄이 늘어져 있는데 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거기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
대단한 기대없이 가볍게 커피 얘기를 훑고 싶은 사람들에겐 권할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