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간첩 김수임사건' 조작 의혹"<AP통신>
뉴스 기사 보다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이름이 떠올라서 그냥 끄적.
대한민국에서 교육받은 30대 이상은 모두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반공 필독 도서라고 해서 매년 학년별로 읽어야할 책 리스트가 내려왔고 그 책을 읽고 6월에 반공 독후감 대회에 독후감을 제출해야할 의무가 따라왔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전씨를 무~지하게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오로라 공주와 손오공'과 '하록 선장' 을 일본 만화라고 방송 중지시킨 것과 어리고 철모르는 내 눈에도 정말 촌스럽고 -ㅅ양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아이 부끄러워라~'수준의- 유치하고 재미없는 책들을 억지로 읽게 강제한 거였다.
글짓기 대회나 독후감 대회에 꽤나 상을 많이 받았었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딱 한번을 제외하고 백전백패를 하던 분야가 바로 반공이었다고 하면 대충 이해를 할까? ㅎㅎ
얘기가 잠시 옆으로 새는 김에 좀 더 새자면 중1 때 상받았던 독후감은 '전쟁과 소년'이라는 제목의 역시나 반공 소설이다. 하지만 지금 그 내용을 떠올려봐도 그 시절에 나오기 힘든, 굉장히 균형잡힌 수작이었다. 북한과 소련 지배에 들어간 북한주민들의 다양한 모습, 월남한 주민들과 남한 주민들과의 갈등과 적응, 미처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뒤처진 일본인들의 모습까지. 해방 직후부터 전쟁 직후까지, 북한 출신의 소년이 겪은 해방공간과 전쟁을 그린 소설인데 내가 유일하게 감동한 반공도서였다. 처음 읽었던 건 국민학교 5학년인가 4학년 때였을 텐데 불행히도 -아마 당연히?- 그 책은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는 필독 반공도서 목록에서 빠져 있었고 중1때 우연히 다시 보고 독후감을 썼었다.
여하튼, 간첩 김수임인가 뭔가 하는.... 이 여인네의 이름이 들어간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오랫동안 내 악몽에 등장하던 '똘이장군'류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선택해 읽으면서 얼굴이 확확 붉어졌던 기억이 어렴풋이. 김수임이 그 대령인가 하는 뭐시기에게 접근하는 과정이며 동생, 애인등과의 그 일련의 사건들이 당시 순진한 어린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좀 선데이 서울에 가까웠었고 어쨌거나 그런 야리꾸리함 때문에 꽤나 재미있게 봤었다. ㅎㅎ 그리고 어린 마음에 저렇게 잘 해주는 남편과 편안한 삶을 두고 왜 간첩노릇을 해서 저렇게 비명횡사를 했을까 하는 지극히 속물적인 생각도 했었다.
독후감은 당연히 망했었지만 내용의 야리꾸리함 때문에 김수임이라는 이름을 오래 기억에 넣고 있다가 그 책에서는 순진한 아해들을 위해 '부부'로 묘사됐던 그 대령과의 관계가 실은 내연 관계였고 김수임은 현지처 정도였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 안 뒤로 '그럼 그렇지~'라고 혼자 빙그레.
그리고 이제는 김수임은 남편도 자식도 버리는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인 간첩 -> 마타하리 -> 시대의 희생양으로 재정립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렇네.
역시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는 얘기인데...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교사들까지 포함된 대규모 간첩단이 적발됐다고 온 나라가 홀라당 뒤집어졌던 일이 있다. 그때 나랑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동창이 자기네 지리 선생님인가 사회 선생님이 바로 간첩이었다고, 그렇게 좋은 선생님이 간첩이라니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고 울었었다. 그 사건 역시 아주아주 한참 뒤에 조작으로 밝혀졌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죽거나 사회적으로 인생을 매장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줘도 모자랄 판에 새롭게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씌울 궁리를 하고 사라졌던 빨갱이와 좌빨이라는 단어에 불을 지피는 인간들이 설치기 시작하니... 물대포에 파란 색소를 넣으면 그 의도가 안 보이는 줄 아나? 숨어있던 쥐가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