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내내 한국에 머물면서 다음 주에는 일산, 그 다음주에는 서울에서 공연이 있는 것 같은데 일산은 너무 멀고 서울 공연은 돈을 더 내고 더 뒤에서 봐야할 상황이라 그냥 비교적 만만한 성남 아트센터 공연을 예매했다. 초연에 크게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기다려왔던 공연이라 이왕이면 사전 감상 정보로 인한 선입견 없이 팽팽한 첫날 무대를 보고 싶다는 욕심도 좀 작용을 했다.
공연을 보고 나온 소감을 요약하면 보지 않았으면 못 봤다는 사실에 아쉬워는 했을지 몰라도 보고 나서 뿌듯함이나 감동은 없었다. 이솝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먹어 보니 꼬장이 아니라 확실히 신 포도였고, 피천득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아니 만났으면 더 좋았을 그런 인연? 그냥 환상과 두근거리는 기대로 남겨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위의 감상은 내 개인적인 거고 팔릴 수 있는 흥행성이라는 걸로 볼 때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자칫 유치할 수 있는 부분들에 의외다 싶을 정도로 세련된 아이디어들이 이용되어 상징적이면서도 명료하게 풀어나갔고 -특히 첫날밤 장면과 사형 집행- 전달력도 대단했다. 무대나 장면전환도 분위기를 끊지 않고 나름대로 스피디하게 진행이 된다. 특히나 무대 장치와 의상은 서구인들이 동양에 갖고 있는 환상을 극대화시켜주는 높은 수준이었다. 발레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무대 예술에 대해 파악한, 뛰어난 연출자의 능력이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를 봤던 입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그 네번째 부인을 두고 부딪치는 비극으로 스토리가 변형이 되려나 등등의 나름대로 했던 여러가지 상상과 달리 공리가 연기했던 네번째 부인은 세번째 부인의 캐릭터와 결합되어 부인은 3명으로, 비극을 연출하는데 필요한 남자 주연은 영화에서는 없었던 경극 배우로 설정해서 진행된다. 시놉시스를 읽으면서 교통정리를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서구에 이 작품을 가져가면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것이고 중국 안에서도 꽤 많은 공감과 자부심을 유발할 것 같다. 하지만 서구인들과 달리 동양 문화에 대한 그 엑조틱한 환상이 없고 또 중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동질적인 감정선이 없는 옆나라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지루했다.
눈요기는 되고 괜찮은 작품이라는 평가는 하지만 감동이 없었다고 할까. 그다지 길지 않은 작품이고 스토리도 명확하고 볼거리도 많은데 내내 지루했다. 왜 그럴까 중간 휴식 시간에 동행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내린 결론이 '클라이막스'가 없고 중심점이 없다.
각 장면 하나하나, 연결과 진행들은 7년에 걸쳐 다듬은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매끈하고 탄탄하다. 하지만 그게 묶이고 엮여서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올라가 폭발하는 클라이막스나 밀고 당기는 굴곡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나열들. 처음에는 감탄하며 즐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지루해지고 멍해지게 된다.
주연 무용수들의 능력은 확실히 테크닉의 천국 중국답게 후덜덜한 균형 감각 등을 과시하면서 뛰어났고, 남자 군무들의 역동성과 통일성은 그나마 만족도를 높여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여자 군무들은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안무 컨셉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어그적...
음악도 서구인들에게는 이국적으로 아주 신선하게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는 아리랑을 활용한 한국의 턱시도 입고 갓 쓴 현대 음악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삑사리는 내지 않았지만 뭔가 여유가 부족한 듯한 연주라 음악 부분에서도 많이 아쉬웠다. 호기심 충족에서 그냥 만족을 해야 할듯.
4천원짜리 프로그램은 출연하는 무용수 프로필조차 소개하지 않고 있다. 성남 아트센터에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없다면 알바라도 쓰지. -_-; 그래도 종이는 좋은 걸 썼지만 사전에 대한 정보도 없고, 장예모의 인터뷰로 장수를 채운 걸 제외하고 내용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M_주제와 상관없는 수다.|접기|주제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인데 서구인들의 눈과 같은 동양권인 일본, 중국인들에게 UBC의 심청이 어떻게 비치고 또 어떤 느낌을 주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심청이 홍등에서 내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 보편성을 갖고 있을까? 이건 나나 한국인들은 답할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중국 국립 발레단이 자국 내에서 열심히 공연하는 그 홍색낭자군과 UBC의 춘향에 비해서는 확실히 홍등과 심청이 국제적으로 팔릴만한 작품이긴 하다. 중국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홍색낭자군은 내용이 있는 서커스이지 발레의 예술성을 따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의 시각 테러 수준이고 춘향도 앞으로는 몰라도 초연 버젼은 견적 내기가 힘든 수준이었으니...
주제와 상관없는 얘기 하자만 더 하자면, 어제는 '공포의 하얀 턱스'를 입은 성남시장이 꽃다발 들고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도대체 코디한 인간이 누구인지. 시장보다 그 사람을 욕하고 싶었다. 20대의 샤방샤방한 새신랑이나 30대 초반의 아직 망가지지 않은 새신랑도 아니고 그 배불뚝이 아저씨에게 흰 턱시도를 입힐 생각을 한 인간이 도대체 누구냐! 강수진 공연 잘 보고 마지막에 정말 시각 테러였음. -_-; - 그렇지만 공연 끝나고 공연장 앞에서 야외 파뤼~는 이번에도 하는 듯.
세종이나 국립극장에서 오모씨와 유모씨가 저랬으면 '세금이 너희들 폼 재면서 먹고 마시라고 있는 돈이냐!'고 이 블로그와 해당 홈피에 열폭을 했겠지만 성남시 돈이니 뭐.... 캐이터링 업체도 먹고 살아야지. 떡도 나눠주더라. 그런데 공연보러 왔으면 나름 먹고 살만한 아줌마들일텐데 그냥 하나씩만 받아가지 번쩍번쩍 잘 차려입고 떡을 몇개씩 챙겨가는 아줌마들을 보면서 참 추접스럽다라고 욕하다가... 하긴 저러니 잘 사는 거겠지라고 또 나름 납득. ^^ 참고로 난 줄 서기 귀찮아서 안 받아왔음. 이러니 내가 부자가 못 되는 걸 수도... -_-;;;
몇년간 말로만 듣던 홍등을 2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비교적 괜찮은 자리에서 봤다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투란도트 때문에 너무 기대가 커서 그렇지 뭐. 강수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드디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앞으로 한달을 살기로 했음. 그리고 내년에 보리스 에이프만가 신작들을, AMP가 카멘을 갖고 오니까 또 봄이 행복할 것 같다. 천재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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