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 1시 조금 못 되서 다 읽은 책.
책 카피가 엄청 땡기게 작성이 되어 있어 출간 전부터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마침 연아양의 COC 보며 삘 받기도 해서 '주말에는 책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제 첫 스타트를 끊었다. 그동안 읽은 로맨스들을 묶어서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할까도 했는데 피겨 얘기가 나온 김에 그냥 끄적끄적하기로 했음.
읽고난 느낌은... 정말 카피 그대로 나른하다.
특별한 악역도 없고 심하게 방해하고 갈등하는 주변 인물도 없다. 남주가 자신의 배경을 본의아니게 감췄다는 것이 갈등요소긴 하지만 그 역시 엄청난 이별이나 파국을 불러오는 그런 사건까지는 되지 않는다.
보통 로맨스에서 이 정도 장치를 했을 때 태풍이나 폭풍이 될만한 복선들이 여기서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비바람 정도. 아마 그래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중후반쯤에 잠깐 지루해져서 훌훌 넘기다가 후반부에 탄력을 받았으니 뭐. 할 말 없음. ^^
하지만 이 잔잔한 나른함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초반에는 따뜻한 봄햇살 같은 남주와 표지의 꽃처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나 들꽃 같은 여주의 투명한 로맨틱함에 미소를 지으면서 동행하고, 제대로 갈등이 고조되지 못해 잠깐 지루했던 중후반부를 지나서는 여전히 귀여운 것들의 귀여운 행동에 부러워하면서 끝까지 읽어나갔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중간중간 나타나는 이 작가 특유의 포복절도할 표현들. 늘 하는 얘기지만 진짜로 부럽다. 특히 남주 아버지의 '허리를 뒤로 접어주겠다'는 협박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낄낄거리게 했다.
그리고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의 시점이 살짝 시간 흐름을 역행해가면서 보여주는 장면들. 쉽지 않은 구성이었을 텐데 그걸 매끈하게 처리한 것은 구조와 구성에 목숨 거는 직업병이 발동해서 혼자 잠시 감탄.
끈적함도 없고,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도 없고 또 사람의 가슴을 벌렁벌렁하게 위기나 갈등도 없고. 강렬한 정통 로맨스만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지겨워~' 라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강렬한 정통 로설을 가장 좋아하지만 가능한 다양하게 골고루 먹자는 주의인 내게는 근래에 만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조미료 안 쓴 담백하고 깔끔한 정찬이었다.
장사를 생각하면 막판에 좀 삐리리~ 한 팬서비스를 넣고 싶었을 텐데 자제한 작가와 편집자들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거슬렸던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이지만 고작 2년도 안 되는 기간동안 페어를 준비해서 올림픽 출전을 해보겠다고??? 아이스댄스라면 어떻게든 이해가 가능한데 페어는 네버. 물론 스케이트장에 처음 놀러온 애가 선수들 연습하는 거 보고 즉석에서 더블 악셀을 펑펑 뛰는 개연성 안드로메다인 일본 만화에 비할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가상이니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나른하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인 기반에 바탕을 뒀던 소설과 맞지 않아서 그 부분에서는 집중력 현저히 저하.
그리고 올림픽 전까지 1년 반동안 남주와 여주가 메일이나 전화로만 소통을 한다는 것도 솔직히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_-; 예전처럼 외국 나가는 게 본인의 일생은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인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도 아닌데 차라리 남주가 본래대로 해외에 파견되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나? 한국에서 첫만남부터 재회, 연애의 과정은 파스텔톤의 예쁜 동화 같으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인 경계를 잘 지켰는데 뒷부분은 쫌 당황...
[#M_책과 별 관계없는 피겨와 연아양 얘기|접기|책과 크게 관계없는 얘기로 튀자면, 스케이터가 주인공인 소설은 처음이다보니 아무래도 김연아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리뷰나 짧은 댓글들을 봐도 그 얘기가 빠짐없이 나오고. 커리어는 쫌 많이 비슷한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연아양과 여주의 성격이 닮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것. ㅋㅋ
예술이나 체육 계통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드러내 놓느냐, 잘 감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다 상당히 예민하고 은근슬쩍 공주병 내지 왕자병이 있으면서 또 독하다. 이게 없으면 버티고 올라가는 게 불가능한 동네니까 이건 성공한 사람들의 필수 탑재요소. 연아양의 광팬들이 보면 분노할지 모르겠지만 연아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시에스타의 여주 지연우는 2번째와 3번째 요소가 상당히 약하게 보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탑이 되기에는 힘든 성격이랄까... 만약 지난 주말에 연아양이 당했던 그런 말도 안 되는 판정이 소설 속 여주에게 떨어졌다면 연우라는 캐릭터는 좌절하고 흔들리고 남주의 위로가 짜잔~하고 등장했어야 할 상황인데... 현실 속 김연아는 독기를 품고 그 방해를 걷어차고 휘리릭 날아버렸다.
물론 진짜로 그들을 밟아버리는 건 최대한 동메달 쯤에서 선을 그으려는 그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을 따내는 거겠지만 그거야 말로 하늘의 도우심이 필요한 상황이니 인간은 그저 기도만 할밖에.
레벤트리 콩쿨 때 세계 음악계에서 '듣보잡'인 정경화가 깐깐한 심사의원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는 명연주를 했음에도 음악계 유대인 마피아의 당시 수장이었던 아이작 스턴이 핀커스 주커만에게 죽어도 1등을 줘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바람에 결국 둘이 다시 재연주까지 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있었고, 그럼에도 결국 핀커스 주커만에게 정해진 각본대로 1등을 줄 수 없어 둘이 공동 우승을 했던 사건이 있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아이작 스턴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주자이자 교육자이고 핀커스 주커만도 진짜 뛰어난 바이올리스트이다. 거기다 젊을 때는 로설 주인공으로 그대로 갖다놔도 될 정도로 잘 생겼였었다. 실물을 보고 싶어서 연주회 찾아가는 여인이 있을 정도로 (<-- 나. ^-^;;;)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핀커스 주커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이고 세계에 아이작 스턴의 영향력이 미칠 수많은 좋은 콩쿠르가 많은데 그때 왜 저랬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갈 정도.
정경화씨의 경우에는 이렇게 아쉬우나마 절반의 승리라도 거둘 수 있었지만 연아양은 그게 가능할지. 실력대로라면, 그날 연아양의 바이오 리듬과 컨디션이 총체적으로 난국이 되어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금메달의 가능성이 진짜로 높은 선수인데... 보는 입장에서는 정말 아쉽고 갑갑할 따름.
소설 속 지연우처럼 화려하게 목적을 달성하면 가장 좋겠고, 만에 하나 불가항력이 되더라도 천재와 동시대에서 호흡하고 그 성장과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부분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대리만족으로 더 즐거웠던 것 같다. ㅎㅎ
뒤늦게 생각난 건데 책표지를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글을 읽었거나, 아니더라도 그 명확한 컨셉을 파악하고 표지를 만들었구나라는 느낌. 피겨 스케이터인 여주가 나오는 내용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정도였다면 블레이드와 빙판의 흔적, 머리 좀 굴려봐야 스핀하는 실루엣 정도가 난무하기 쉬운데 그 쉬운 길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여주의 이미지와 딱 맞는 색감과 꽃. 표지와 내용이 정말 이렇게 잘 맞아떨지도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겨라는 소재를 이렇게 녹여내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보기 드문 분위기의 독특한 소설이었다.
쿨해서 매력적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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