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매날짜를 착각하는 바람에 예매에 실패하고 포기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어제 갔다 왔다.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하생략. (아마 이 글을 몇년 뒤에 읽으면 나도 이유를 잊어먹고 뭐였을까? 하지 않을까 싶음.)
건반을 볼 수 없는 오른쪽이기는 했지만 간만에 1층에 앉는 호사를 누리면서 키신을 기다렸다. 3년 전, -레퍼토리는 과히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연주 때 너무 감동을 받은데다가 이번엔 1부 프로그램이 프로코피예프로 완전히 내 취향이라 더더욱 기대 만빵~
시간이 되자 키신이 무대에 등장한다. 인사를 한 뒤 바로 피아노에 앉아 첫곡인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중 줄리엣을 치기 시작. 줄리엣, 머큐쇼, 몬테규와 캐플릿. 이 세 곡을 치는데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이 얼마만인지. 이 세곡을 들으면서 2부에 쇼팽은 뭐냐! 1부는 로&줄 전곡으로 2부는 소나타를 쳐야지! 하고 혼자 속으로 울부짖었다.
오케스트라 버전의 그 웅장함이 과연 피아노라는 악기에서 제대로 묘사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한 울림. 키신이라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악기의 극한까지 표현해내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스친다. 발란신이 살아서 이 연주를 들었다면, 레 실피드를 피아노 반주 버전의 쇼피니아나로 새롭게 안무한 것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 나름으로 안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발레에도 조예가 깊은 ㅇ씨가 기자 간담회 때 발레 음악을 피아노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요지의 질문을 했더니, '발레도 아름다운 예술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음악이 일차적이고 더 중요하다.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발레라도 2류 작곡가가 쓴 음악이 있는 발레는 참을 수가 없었다.'는 내용의 답을 했다던데... 키신은 돈키호테나 라 바야데르, 해적이나 파라오의 딸 같은 발레는 절대 못 보겠구나...라고 얘기하면서 웃었음. 근데 해적이나 파라오의 딸은 무용수들이 엄청나게 잘 하지 않는 이상 음악만으로는 맥이 빠지긴 하지. ^^;
이어진 프로코피예프 8번 소나타. 이날 키신이 가장 힘을 쏟고 또 가장 빛났던 건 이 곡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행이나 참선하는 구도자를 바라보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연주.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었던 1악장과 2악장이 마지막 3악장에서 완성되는 그 과정을 느끼게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은데... 저 곡을 어떻게 외웠을까 싶고 -특별히 외우기 어려운 곡들이 있는데 이건 최고봉에 속하는 것 같다- 완전히 소화해낸 테크닉과 체력에 다시 한번 감탄.
소련으로 돌아간 뒤 형식주의자로 비판받으면서 예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받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서 생산된 프로코피예프의 중후기작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자기 검열이라는 치명적인 족쇄 속에서 음악 활동을 계속해낸 걸 보면 프로코피예프도 정말 나긴 난 작곡가인 모양이라고 작곡가에게도 또 한번 감탄. ^^
2부는 키신이 좋아하는 -나는 좋아하지 않는- 쇼팽으로 도배가 된 무대.
환상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를 들으면서 '너 쇼팽 콩쿠르 안 나가길 잘 한 것 같다.'와 '역시 나랑 쇼팽은 안 맞는구나.' 라는 생각을 번갈아 가면서 했다. 아름다운 곡이기는 하지만 너무 감상적이랄까? 키신도 1부에 비해 뭔가 몰입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연 끝나고 연주 얘기를 하는데, 오늘 연주는 징그러울 정도로 균일했던 3년 전에 비해 곡에 따라 업다운이 좀 있었고 폴로네즈랑 마주르카 부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는 느낌을 공통적으로 토로. 내가 쇼팽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줄 알고 쪼그라져 있었다가 '사실은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에튜드를 들으면서는 '그래, 너 정말로 잘 친다.'라는 생각. 내가 그렇게 집중하지 못하는 쇼팽을 이 정도로 몰입시킬 정도면 뭐... 길게 말 할 필요가 없다. 환상적인 아르페지오. 한발만 넘어가면 지저분하다고 느낄 그 한계에서 딱 절묘하게 걸쳐있는 페달링. 피아노 소리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 울림이라니. 쇼팽이 원하던, 또 그가 직접 연주해 낭만주의 시대 여인네들을 매료시켰던 에튜드가 바로 이게 아니었을까 싶음.
보통 중학생 정도면 치기 시작하는 게 이 쇼팽 에튜드인데 이날 연주 들으러 온 전공자들은 다들 엄청나게 좌절했을 것 같다. 같이 본 일행 중에 작곡 전공자도 하나 있었는데 둘이 걸어내려가면서 피아노를 안 하기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음. 내가 피아노 전공자였으면 부러워서... 혹은 열 받아서 잠을 못 잤을 것 같다. 임동혁(임동민인가?)이랑 김선욱도 왔다고 하던데 나름대로 쇼팽 잘 친다는 친구들이고, 엄밀히 말하면 동업자이자 경쟁자이니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겠지.
그리고 3부는 앵콜. 10곡이라고 하던데 11곡 아니었던가??? 중간부터 세는 걸 잊어버렸고 또 숫자 자체는 큰 의미가 없으니까 느낌만 간략 정리하자면.
1. 키신은 정말로 쇼팽을 사랑하는가보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쇼팽곡인 강아지 왈츠 들으면서 혼자 싱글벙글~
2. 앵콜로 이렇게 듣기에는 정말로 미안한 곡들을 연주해주다니.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나 프로코피예프의 악마적 암시를 앵콜로 연주해주다니. @0@
3. 저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함에도 나는 키신의 눈부신 테크닉으로 왕벌의 비행을 앵콜로 한번 들려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못된 기대를. 근데 ㅇ씨는 라 캄파넬라 해줘~라고 기도하고 있었고, ㅌ님은 카르멘 변주곡 해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나...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이다. ㅎㅎ; 근데 왕벌의 비행이나 라 캄파넬라를 키신이 어제 쳐줬으면 다들 쓰러져서 119 몇대 불렀어야 했을듯.
4. 10번째인가? 터키 진곡을 쳤다. 나도 (아마도 체르니 이상 배운 애들은 다 그렇듯이) 옛날에 피아노 배울 때 이 두 곡은 쳤었는데... 들으면서 그 소음을 참느라 고생했을 선생님과 가족들, 이웃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_-;
5. 터키 행진곡 치기 전까지는 키신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쯤 되니까 체력이 후달리는지 살짝 삐걱거리면서 중간중간 아귀가 안맞고 오른손이 왼손을 따라가지 못하는 터키 행진곡을 들으면서 오히려 호감도 급상승. 당신도 인간이긴 하구나.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 앵콜을 받아주다니 정말 고맙다 등등의 생각을 했음.
6. 내년에 환율이 좀 정신을 차리면 5년에 한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를 구경할 겸 바르샤바로 갈까 했는데 관두기로 했다. 키신도 괜찮군~ 정도인 내가 며칠 내내 쇼팽만? 뭐... 재수가 좋으면 제 2의 부닌 탄생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만 확률 낮은 모험을 하기엔 낭만주의 음악과 나는 코드가 참......
7. 키신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인데... 어제 친 쇼팽들이 피겨 스케이트에서 많이 쓰이는 곡이다보니 레볼루션 에튜드에서는 야구딘이 저기서 스텝 밟았지, 저기가 점프 타이밍었군, 이러고 환상 교향곡에서도 마오며 등등 피겨 선수들의 동작이 떠오르는 부작용이 있었다. ㅎㅎ; 피겨와 쇼팽.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착착 달라붙는 걸 보면 신기함.
3년 전 연주와 아무래도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전체적인 완성도나 키신의 컨디션, 안정감은 3년 전 독주회가 조금 더 위였던 것 같다. 하지만 1부 레퍼토리가 완전 내 취향이고 또 중간중간 눈부시게 반짝였던 그런 부분들은 이번 연주회에 좀 더 있었음. 여튼 이번 연주는 곡 별로 업다운이 좀 심했다로 요약하고 싶음.
사인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분위기에 휘말려 사인줄에 서버렸다. 내 바로 뒤에서 사인을 자르려고 했는데 지방에서 왔다고 애원한 두 아가씨까지 허락해주는 바람에 끝에서 세번째로 사인 받는 거 성공. 가보로 간직해야겠다.
사인 끝난 시간이 택시 잡기가 가장 난해한 시간 대라서 어차피 늦은 거 가볍게 한잔 하고 헤어지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예당 아래로 내려와 교대 방향으로 꺾어지자마자 있는 치킨+호프 집으로 갔다. 별 생각없이 그냥 열려있어서 들어간 집인데 치킨도 제대로고 전반적인 안주 수준이 전반적으로 아주 괜찮음. 가격도 착했고. 앞으로 예당 공연 끝나고 한잔 하고 싶을 때는 여기를 애용해 줘야겠다.
공연 기획사 다니는 사람도 있고 또 기자도 있어서 재미있는 뒷 얘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그것까지 옮기기는 너무 귀찮음. 그건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따로 포스팅~
그나저나 갑자기 삘 받아서 베레초프스키 연주회를 예매할까 고민중. 키신처럼 화려하고 풍부한 맛은 없지만 무시무시하게 몰아치는 맛은 있는 아저씨니 확 풀고 오기에는 또 제격이라.... 라흐마니노프는 심하게 내 취향이지만 브람스라는 암초가... -_-;;; 스케줄 봐서 결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