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달에 예매할 때는 과연 살아서 이걸 볼 날이 있으려나 했는데 매년 그렇듯 어김없이 그날이 오긴 왔다.
사람의 촉이라는 게 확실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같이 보기로 한 친구 거를 예매하면서 왠지 이 친구랑은 못 볼 것 같고, 동생이랑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 매진 되서 다들 표 구하려고 난리난 공연이라 팔까 했었는데 오늘 있었던 동생의 선약이 취소되는 바람에 결국 예상대로~ 복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듯.
사설이 길었는데 각설하고, 공연은 정말 최고 수준!
한국에서 파르지팔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데 캐스팅도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구르제만즈 연광철, 쿤드리 이본 네프, 파르지팔 크리스퍼 벤트리스, 암포르타스 김동섭, 클링조르 양준모, 티투렐 오재석. 유럽에서 그 어렵다는 바그너 가수들로 활동을 하고 있거나 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오케스트라에 전혀 밀리지 않고 소리가 빵빵 (근데 이건 내가 무대 앞쪽에 앉았기 때문에 100% 장담은 못 함. 공연장 끝까지 찌르면서 뻗어 나가는 소리가 있는 반면 앞에만 채우는 소리가 있으니) 하니까 정말 귀가 시원하다.
오페라에서 비주얼과 캐릭터의 괴리감은 어차피 자기 최면을 통해서 포기해야지 그 일치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선 불가능 수준- 이니 잘 하는 노래에다 연기만 적당히 잘 해주면 장땡~ 그런 측면에서 이날 가수들의 능력은 귀가 엄청 호강을 한 수준이었고 연기들도 2막의 악역 클리조르를 비롯해 다들 끼가 넘치셨음~
오케스트라 반주가 코심이라고 했을 때 속으로 '으아악!!!' 했는데 지휘자의 역량인지, 마지막 날이라 그동안 실전을 통해 연습이 많이 됐는지, 아니면 그날이 오신 날인지는 모르겠으나 코심답지 않은 비교적 풍부한 사운드에 흐름을 깨는 삑사리가 없었다. 여러 모로 음악적으로 운이 좋은 날이었음.
연출은... 내용 자체가 성배와 성창의 신화를 갖고 만든 거니 당연하겠지만 굉장히 기독교적인 기반에 입각한 전통적인 연출이었다고 해야겠다. 가장 납득하기 쉽고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너무 그 안에 집중한 것 같아서 살짝 아쉬웠다. 파르지팔 전설 안에 내재된 켈트 신화의 상징 코드들을 좀 더 살려줬더라면 비기독교인들이 느꼈을 수도 있는 괴리감이 살짝 더 상쇄되고 좀 더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살짝 했다.
무대 장치는 적당히 모던하면서도 너무 전위적인 것은 아닌 절묘한 수준에서 잘 만든 것 같았다. 거울을 활용한 거며 나무, 성배의 아이디어는 호불호가 있겠지만 나는 아주 만족~ 의상은 섬세한 디테일에 -꽃처녀들, 코러스의 의상까지 모두 디테일이 달랐다.- 감탄~
끝나고 관객들과 출연진들은 얼마든지 커튼콜을 더 길게 할 의향이 충분히 있었는데 퇴근을 빨리 하고 싶었는지 진행팀에서 조명을 빨리 꺼버리고 막을 내려버려서 아쉬웠다. 이날 공연은 최소한 10번 이상의 커튼콜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국립 오페라 합창단 해체 등의 뻘짓과 정치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이전 국립 오페라단 단장님은 우매한 대중들로선 차마 이해할 수 없었던 너무나 높은 예술 세계를 추구하셔서 참 괴로웠는데 앞으로 몇년 간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거지들이 등장하는 도니제티 등등은 안 만나도 될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하다. 그분의 앞서 나가는 높으신 예술과 연출을 이해 못 하는 나의 아둔함이 쫌 미안하긴 하지만 난 이 정도가 딱 좋네. ^^;
그리고 지금 문화부 장관님이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뉘신지 모르도록 잘 계셨으면 좋겠다. 비싼 프로그램 첫장에 빠짐없이 등장하시던 그 유모 장관님을 비롯한 문화부 장관 나으리들 사진이 없는 프로그램을 만나니 정말 깔끔하니 좋구나~
프로그램은 좋은 내용들에다 리브레토도 충실하게 실어 놓아서 7천원이었는데 만원을 줘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음. 지금 국립 오페라단 단장님 역시 뉘신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에 이런 공연을 올려준다면 열심히 내 돈 내고 공연보러 다닐 의향이 충만하다.
올 가을은 영혼을 행복하게 해주는 훌륭한 공연들이 많아서 좋구나~
이렇게 힐링을 하면서 잘 살다보면 5년이 또 지나가겠지. ;ㅁ;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