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를 위한 연이은 생명공학 관련 독서에 지친 뇌를 쉬게 해주기 위해 잡았다.
얇기도 하고 또 국사책에서 배웠던 민영환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선택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었고, 을사조약을 항의하는 의미로 자결한 지사라는 평면적인 한국 위인 민영환을 재발견하는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세력가인 민씨 일가의 중심부에라는 배경에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일찌감치 출사한 최상류 엘리트가 미국과 유럽을 거쳐 러시아로 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안목을 넓히고 성장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공식 문서용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내밀한 고백 같은 건 없지만 건조한 기록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관심사와 행보가 더 객관적으로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앞선 서구를 보면서 깨어나고 있음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의 한계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황령(皇靈)의 도우심이니 하는 류의 곳곳에 드러나는 전제 황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 대상이 되는
고종에 대한 진실한(혹은 진실하게 보이는) 애정과 흠모는 백년 이상의 시간 차이를 두고 바라보는 내게 경이인 동시에 씁쓸한 연민 등등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게 바로 민영환이라는 뛰어난 존재의 한계로구나 하는. 그래도 시대를 뛰어넘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건 한 세기에 한두명만 나와야지 여러명이 나오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지 싶다는 이유로 이해.
이 여행기를 통해 민영환에 대한 탐구를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방문했던 국가들에 대한 기록도 아주 흥미롭다. 많이 미화된 시각이긴 하지만 동양인이라는 3자의 눈으로 본 서구 사회의 풍물이나 생활상들은 나도 러시아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했다. 고물가와 불친절, 바가지로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여행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해졌다는 부작용을 낳았음.
이건 현대에서 이미 확정된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의 특권인데, 러시라오 떠나는 민영환이 받은 조칙에 실린 '외무대신 이완용'이라는 이름과 동행했던 윤치호의 윤치호 일기가 인용된 부분을 볼 때 마음이 참 묘하고 스산하고 씁쓸하고 역시나 아주 복잡미묘 야리꾸리 했다.
조선 말기에 날리던 천재 중 하나였던 이완용이야... 어쨌든 조선이라는 좁은 땅 안에 있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치고, 윤치호는 일찌감치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또 이 책에 의하면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서 러시아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둔 것도 모자라 프랑스로 가서 공부를 더 한 것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윤치호 일기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나름대로 치열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결과는 이완용과 더불어 매국노 중의 매국노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윤치호의 행적을 보면서 지금 저 딴나라인지 성나라인지에서 설치는 운동권 출신 인간들이 오버랩 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Ctrl+V 된다.
본래부터 나쁜 X이었던 것들은 사람들이 대비라도 하지만 한때 착했던, 혹은 착했던 척이라도 했던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나쁜 X으로 변신할 때의 악독함이나 폐해는 전자보다 엄청 더 심하고 유능하고 똑똑하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재앙이나 재난 수준이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민영환 공의 자결을 위인전에서 읽을 때 난 어릴 때임에도 좀 시큰둥했었다. 이왕 죽을 거면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일본 고관대작이나 하다못해 을사오적과도 맞대면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많을 텐데 하나쯤 죽이고 갈 것이지 왜 혼자만 갔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구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저런 무리들과 합세해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영환이라는 인물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절하지 않는 인간의 존재는 참으로 희귀한 듯. 슬프다.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러 떠난 때 나이가 만 35세. 비교적 젊었기에 힘든 여정에 눌리지 않고 많은 것을 보고 다양한 사유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행은 많이 갈수록 좋지만 이왕이면 젊을 때 움직이는 게 자신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러시아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 책을 챙겨들고 그의 행보를 조금은 따라가 보아야겠다. 내 머릿속에는 칙칙한 잿빛 일색으로 칠해진 구한말에 모처럼 매력적인 인물을 하나 만나게 되어 기쁘다.
이건 옥의 티인 것 같은데, 하바롭스크에 있다는 향토박물관 사진 옆에 '발해와 거란(금) 유적이 다수 있다'는 설명이 있던데 저자가 착각을 했거나 '발해와 거란, 금의 유적이 다수 있다'로 써야할 부분이 잘못 편집된 거지 싶다. 국사를 배운 사람들은 모두 알다시피 거란이 세운 나라는 '요'이고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임.